쿠마모토현의 역사 14 - 히고의 '삼국지' 시대
三つの勢力 히고의 세 세력
この状況にさらに混沌をもたらす二つの存在が肥後国に向かっていた。一人目は南朝の征西大将軍・懐良親王であった。親王は伊予・薩摩を経て、貞和4年/正平3年(1348年)肥後の宇土に着いた。迎えた惣領を継いだ菊池武光を伴い、阿蘇惟澄の所領を通過して菊池氏の隈府山に入った。
이 상황에 더욱 혼돈을 가져올 두 존재가 히고 국을 향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남조의 정서대장군인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었다. 친왕은 이요(伊予)와 사쯔마(薩摩)를 거쳐, 죠와(貞和) 4년/쇼헤이(正平) 3년(1348년) 히고의 우토에 도착했다. 그는 총령의 자리를 이은 키쿠치 타케미쯔를 따라 아소 코레즈미의 영지를 통과해 키쿠치 가문의 와이후 산(隈府山)으로 들어갔다.
そして二人目は足利直冬。足利尊氏の庶子ながら父に疎まれる、叔父足利直義の養子になっていた。高師直・師泰兄弟と対立していた直義は、貞和5年/正平4年(1349年)直冬を中国探題に任命し、中国地方に影響力を及ぼそうとした。しかし師直は、配下に直義を攻めさせた。この時、直義を助けたのが肥後武士・河尻幸俊だった。河尻氏は、源高明の孫・実明を源流とし、飽田南郷川尻(現:熊本市)にあった国衙役人の系統にある清和源姓の一族とされる。鎌倉時代中期には、河尻泰明が寒巌義尹を招いて大慈寺を開山し、朝廷や北条氏との関係を設けて勢力を伸ばした。肥後国の中では北朝に属していた。
두 번째 인물은 아시카가 타다후유(足利直冬)다. 그는 아시카가 타카우치의 서자였으나 아버지로부터 쫓겨나 숙부인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直義)의 양자가 됐다. 코노 모로나오(高師直)・모로야스(師泰) 형제와 대립하던 타다요시는 죠와 5년/쇼헤이 4년(1349년)에 타다후유를 츄고쿠탄다이(中国探題)에 임명해 츄고쿠 지방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했다. 하지만 모로나오는 부하를 시켜 타다요시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 타다요시를 도운 사람은 히고의 무사 카와시리 유키토시(河尻幸俊)였다. 카와시리씨는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의 손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明)를 시조로 하며, 아키타 남향 카와시리(飽田南郷川尻, 현 쿠마모토시)에서 대대로 국아(国衙)의 관리를 지낸 세이와 겐지(清和源姓)의 일족이라고 한다.
카마쿠라 시대 중기에는 카와시리 야스아키(河尻泰明)가 칸간 기인(寒巌義尹)을 초청해 다이지 사(大慈寺)를 개산하고, 조정 및 호죠씨와의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넓혔다. 히고국 내에서는 북조 측에 속해 있었다.
河尻幸俊に招かれ肥後に入った足利直冬は、幕府の威を借りて九州の武士団に指揮下に集結する呼びかけを行い、また所領安堵などを与えた。その一方で肥後の探題方に与する勢力を攻略し、観応元年(1350年)大宰府に入った。足利尊氏や高師直らは直冬討伐令を発した。そして、菊池には南朝の懐良親王が在した。こうして、元号でも正平・観応・貞和(足利直義が用いた)の三つが並ぶ、肥後版観応の擾乱を特色づける三勢力の鼎立状態に突入した。
카와시리 유키토시의 초청을 받고 히고에 들어간 아시카가 타다후유는 막부의 위세를 빌려 큐슈의 무사단에게 자신의 지휘 하에 집결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그들의 영지를 안도(安堵, 인정)해 줬다. 한편으로는 히고의 탄다이 측에 가담하는 세력을 공략해 칸노(観応) 원년(1350년), 다자이후에 입성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코노 모로나오 등은 타다후유 토벌령을 내렸다. 그리고 키쿠치에는 남조의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 있었다. 이리하여 원호(연호)에서도 쇼헤이, 칸노, 죠와(貞和,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사용)라는 3가지가 병존하는, 히고판 칸노의 소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세 세력의 정립(鼎立) 상태[1]에 돌입했다.
宮方(南朝方):懐良親王、菊池武光、阿蘇惟澄、五条頼光
尊氏方(探題方):一色範氏・一色直氏(九州探題)親子
直冬方(佐殿方):足利直冬、河尻幸俊、詫磨宗直(肥後大浦)、少弐頼尚(筑後)
観応2年(1351年)2月高師直・師泰が権力闘争に敗れ殺されると、足利直義は権力を掌握し、直冬方は勢いを得た。直冬は鎮西探題に、河尻幸俊は肥後国守護に就任した。一色氏は宮方と一時協定を結び、菊池武光らは筑後に進んで直冬方と激しく戦った。しかし同年正平一統が成り、翌年に直義が殺害されると、同様に勢いを失墜した足利直冬は九州から逃れ、三つ巴の状態は終わった。
천황 측(남조 측) : 카네요시 친왕, 키쿠치 타케미쯔, 아소 코레즈미, 고죠 요리미쯔(五条頼光)
타카우지 측 (탄다이 측) :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 잇시키 나오우지(一色直氏, 큐슈 탄다이) 부자
타다후유 측 (스케도노 측(佐殿方)) : 아시카가 타다후유, 카와시리 유키토시, 타쿠마 무네나오(詫磨宗直, 히고 오우라),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치쿠고)
칸노 2년(1351년) 2월 코노 모로나오・모로야스가 권력투쟁에서 패해 죽고,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권력을 장악해 타다후유 측은 기세를 얻었다. 타다후유는 친제이 탄다이에, 카와시리 유키토시는 히고국 슈고에 취임했다. 잇시키씨는 남조 측과 일시 협정을 맺었고, 키쿠치 타케미쯔 등이 치쿠고에 가서 타다후유 측과 격렬히 싸웠다. 하지만 같은 해 쇼헤이 일통(正平一統[2])이 이뤄졌고, 이듬 해에는 타다요시가 살해당했다. 마찬가지로 기세를 잃은 아시카가 타다후유가 큐슈에서 도망치면서 삼파전의 상태는 끝이 났다.
筑後川の戦い 치쿠고 강의 전투
直冬逃亡によって再び南北朝対峙の状態に戻った九州では、探題方対佐殿方の内紛を尻目に宮方は勢いを強めていた。懐良親王の威光に加え、合戦を指揮した菊池武光のカリスマ性もあり、肥後はふたたび「南朝一辺倒」となった。文和2年/正平8年(1353年)筑前に攻め入った宮方は観応の擾乱で一色直氏軍を破り、翌々年には博多を攻略した。一色範氏・直氏親子は九州を脱した。
타다후유가 도망치면서 다시 남북조 대치상태로 돌아온 큐슈에서는 탄다이 측과 스케도노 측의 내분을 틈타 천황 측이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카네요시 친왕의 위광에 합전을 지휘한 키쿠치 타케미쯔의 카리스마가 더해져 히고는 다시 한번 ‘남조 일변도’가 됐다.
분나(文和) 2년/쇼헤이 8년(1353년) 치쿠젠에 쳐들어간 천황 측은 칸노의 소란에서 잇시키 나오우지 군을 격파했고, 2년 뒤에는 하카타를 공략했다. 잇시키 노리우지・나오우지 부자는 큐슈를 탈출했다.
こうなると、少弐氏や大友氏など九州探題の一色氏と対立していた旧守護派は宮方と手を結ぶ必要が無くなり、再び対立するようになった。延文3年/正平13年(1358年)大友氏時は挙兵し、少弐頼尚も呼応して菊池氏本拠を目指した。菊池武光は五条頼光などを集めて北上し、頼尚も龍造寺氏・深堀氏・松浦党などと結集しこれを迎え、翌年両軍は筑後川の戦いで激突した。7月19日に始まった戦闘は、8月6日宮方の夜襲で決した。双方かなりの痛手を負ったが、少弐軍は敗退して以後衰退し、菊池氏は博多合戦の恨みを晴らした。
이렇게 되자, 쇼니씨와 오토모씨 등 큐슈 탄다이인 잇시키씨와 대립하던 구 슈고파는 천황 측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어져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엔분(延文) 3년/ 쇼헤이 13년(1358년) 오토모 우지토키(大友氏時)가 거병했고,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도 이에 호응해 키쿠치 씨의 본거지를 목표로 삼았다. 키쿠치 타케미쯔는 고죠 요리미쯔(五条頼光) 등을 모아서 북상했다. 요리히사도 류조지씨(龍造寺氏), 후카호리씨(深堀氏), 마츠우라당(松浦党) 등과 결집하여 이를 맞이했다.
이듬해 양군은 치쿠고강의 전투에서 격돌했다. 7월 19일에 시작된 전투는 8월 6일 천황 측의 야습으로 결판이 났다. 양쪽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쇼니군은 패퇴한 이후 쇠퇴하게 되어 키쿠치씨는 하카타 합전의 원한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