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15 - 정서부의 성립과 붕괴

kumamon.kr 2023. 11. 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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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현 키쿠치시에 있는 키쿠치성 유적(2019년 촬영)

征西府の成立と崩壊

정서부의 성립과 붕괴


康安元年/正平16年(1361年)、懐良親王は宇土到着から18年を経て大宰府に入り、征西府を置いて北部九州を掌握した。その政治機構は、父・少弐頼尚に背いて南朝方に着いていた少弐頼澄を筆頭とする12人の府官によって成ったが、実際は肥後守護となった菊池武光ら菊池一族が握った。この頃には中央での南朝勢力は衰えていたため、征西府は幕府から独立した軍事政権の様相を帯びた。これは明や高麗との国交において顕著で、貿易権の掌握や、倭寇取締りを求める明からの使節が征西府に赴いたところや、明が「良懐」すなわち懐良親王を「日本正君」に冊封したところからも窺える。

코안(康安) 원년/쇼헤이 16년(1361년), 카네요시 친왕은 우토에 도착한지 18년 만에 다자이후에 입성해 정서부를 설치하고 북부 큐슈를 장악했다. 정서부는 아버지인 쇼니 요리히사를 등지고 남조 측에 가담한 쇼니 요리즈미(少弐頼澄)를 필두로 한 12명의 부관들로 구성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히고 슈고인 키쿠치 타케미츠 등 키쿠치 일족이 장악했다.

이 무렵 중앙에서는 남조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기에, 정서부는 막부로부터 독립된 군사정권의 양상을 띠었다. 이는 명, 고려와의 국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무역권의 장악이나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는 명나라 사절이 정서부에 간 일, 명이 ‘양회’(良懐), 즉 카네요시 친왕을 ‘일본국왕’[1]에 책봉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当然の成り行きながら足利幕府は征西府を認めず、肥後守護に大友氏時を任じ、そして後任に阿蘇惟澄を推すなど南朝方の内部瓦解を画策するなどの行動を取っていた。そして応安3年/建徳元年(1370年)幕府は実効的な手を打ち、今川貞世(了俊)を九州探題に任命し、中国地方の武士団を引き連れ、九州でかつての北朝勢力をも懐柔して大宰府に攻め込んだ。大友氏や松浦党などを配下に収めた貞世の、多方面からの攻撃を受けた懐良親王・菊池武光らの征西府は応安5年/文中元年(1372年)墜ちた。この後二年間は筑後川流域を戦場に争ったが、武光そして菊池武政が亡くなり、宮方は肥後まで押し戻された。

당연히 아시카가 막부는 정서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히고 슈고에 오토모 우지토키를 임명하고, 뒤이어 후임에 아소 코레즈미를 세워서 남조 측의 내부 와해를 획책하는 등 여러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안(応安) 3년/ 켄토쿠(建徳) 원년(1370년) 막부는 실효성이 있는 수를 써서,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법명은 료슌(了俊))를 큐슈 탄다이에 임명했다. 

그리고 막부는 츄고쿠 지방의 무사단을 이끌고, 큐슈의 과거 북조 세력도 회유하여 다자이후에 쳐들어갔다. 오토모 씨와 마츠우라당 등을 휘하에 거느린 사다요가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펼치자, 카네요시 친왕, 키쿠치 타케미츠 등이 이끌던 정서부는 오안 5년/분츄(文中) 원년(1372년)에 무너졌다. 이후 2년간 치쿠고 강 유역을 전장으로 하는 싸움이 계속됐으나, 키쿠치 타케미츠와 타케마사(菊池武政)가 죽은 뒤, 천황 측은 히고까지 밀려났다.

武政が築いたとも言われる本拠・菊池城に篭った宮方は、今川貞世に完全に取り囲まれていた。さらに貞世は九州三人衆と呼ばれた島津氏久・大友親世・少弐冬資にも参戦を命じ、菊池氏の殲滅を図った。しかしここで不可解なことが起こる。当初消極的な態度を見せた少弐冬資が島津氏久に説得されて参陣すると、貞世は冬資を殺害する挙に出た(水島の変)。氏久は怒り、以後反貞世に態度を転じた。このような混乱は宮方でも起こっていた。懐良親王は亡き武政の嫡男・菊池武朝と意見が衝突し、征西将軍職を辞した。武朝は後任の良成親王を奉じて肥前に攻め込んだが敗退。肥後の臼間野・大水(玉名郡南関町)でも大敗した。

타케마사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본거지 키쿠치성에 틀어박힌 천황 측은 이마가와 사다요에게 완전히 포위당한다. 또한 사다요는 큐슈 삼인방이라 불리는 시마즈 우지히사(島津氏久), 오토모 치카요(大友親世), 쇼니 후유스케(少弐冬資)에게도 참전을 명해 키쿠치씨의 섬멸을 꾀했다.

하지만 여기서 불가해한 일이 벌어진다. 당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쇼니 후유스케는 시마즈 우지히사의 설득으로 참전했는데, 사다요가 이 후유스케를 살해하고 말았다. (미즈시마섬(水島)의 변) 화가 난 우지히사는 이후 반(反) 사다요로 입장을 바꿨다.

이런 혼란은 천황 측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카네요시 친왕은 죽은 타케마사의 적남인 키쿠치 타케토모(菊池武朝)와 의견 충돌 끝에 정서장군직을 사임했다. 타케토모는 후임인 요시나리 친왕(良成親王)을 받들고 히젠에 쳐들어 갔으나 패퇴했다. 이들은 히고의 우스마노(臼間野), 오미즈(大水, 타마나 군 난칸 정(南関町))에서도 대패했다.

 

정서부를 이끌던 키쿠치 타케미츠


反抗を見せる島津氏を、薩摩の国人に一揆を起こさせ封じた今川貞世は、菊池氏との争いに決着をつけるべく戦力を結集した。永和4年/天授4年(1378年)、中国勢も従え隈本・藤崎に陣を構えた貞世は菊池への兵糧攻めを行った。奇襲に討って出た菊池武朝は詫麻原の戦いに勝利するも焼け石に水。永徳元年/弘和元年(1381年)には菊池城や木野城など菊池氏勢力下の各城が落ち、武朝は南へ逃れた。貞世は軍を進めて河尻・宇土を次々に占領し、明徳2年/元中8年(1391年)には名和氏の八代を攻略した。そして翌年、中央で明徳の和約が成ったことを契機に武朝は降伏し、今川貞世の肥後制圧は完了した。今川貞世は菊池氏の本領を安堵し武朝を肥後国守護代に任命するなど九州勢力の掌握に努めたが、かえってこれは征西府再現を狙っているのではという将軍足利義満の嫌疑を生み、応永2年(1395年)貞世は罷免された。

이마가와 사다요는 사츠마 국의 국인들에게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하여, 반항의 기미를 보인 시마즈 씨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사다요는 키쿠치 씨와의 싸움을 결착지을 수 있도록 전력을 결집했다.

에이와(永和) 4년/텐쥬(天授) 4년(1378년), 츄고쿠 세력을 거느리고 쿠마모토(隈本)・후지사키(藤崎)에 진을 세운 사다요는 키쿠치 씨의 군량을 공격했다. 기습을 감행한 키쿠치 타케토모는 타쿠마 벌판의 싸움에서 승리했으나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했다.

에이토쿠(永徳) 원년/코와(弘和) 원년(1381년)에는 키쿠치 성, 키노 성 등 키쿠치씨 세력 하의 각 성이 함락되고, 타케토모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사다요는 군대를 진격시켜 카와시리와 우토를 차례로 점령하고, 메이토쿠(明徳) 2년/ 겐츄(元中) 8년(1391년)에는 나와 씨(名和氏)의 야츠시로를 공략했다. 그리고 이듬해, 중앙에서 메이토쿠의 화약이 이뤄진 것을 계기로 타케토모는 항복했고, 이마가와 사다요의 히고 제압은 완료됐다.

이마가와 사다요는 키쿠치 씨의 본령을 인정해주고 타케토모를 히고국 슈고대리(守護代)에 임명하는 등 큐슈세력 장악에 힘썼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정서부 재건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쯔(足利義満)의 의심을 사서, 사다요는 오에이(応永) 2년(1395년)에 파면됐다.

 

 

사진출처

* 키쿠치 성

* 키쿠치 타케미츠 

 


[1] 여러 소스에서 ‘일본정군’이 아니라 ‘일본국왕’으로 책봉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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