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현의 역사 6 - 율령제와 흰거북이 이야기
율령제
飛鳥時代から導入された律令の調庸のうち、肥後から納められる特徴的な品目に繭綿と絹織物があった。これは『和名類聚抄』および『続日本紀』中に、貢進される数量の多さとともに記されている。また、紫草も多く貢上され、これらは平城京跡や大宰府から出土した木簡にある記述に裏付けられている。この他にも、朝廷の正月節会料のための「腹赤魚(はらか)」など海産物の献上記録などが残されている。肥後国の納税能力は高く、『弘仁(主税)式』に記録された出挙稲数では、九州総計459万束のうち123万束を肥後国が占めている。そのため公営田制導入において肥後国は、延暦14年(795年)には国等級区分が「上国」から「大国」へと昇格され、その中心を担う一国に据えられた。
아스카 시대부터 도입된 율령의 조세제도인 조용(調庸) 중에, 히고에서 올라온 특징적인 품목으로는 겉풀솜(繭綿)과 견직물이 있었다. <화명류취초> 및 <속일본기>에는 이것들을 헌상된 수량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자초(紫草)도 많이 진상됐는데, 이는 헤이죠쿄(平城京) 터나 다자이후에서 출토된 목간의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이 밖에도, 조정의 정월 연회 재료를 위한 송어(腹赤魚) 등 해산물을 헌상한 기록 등도 남아 있다. 히고국은 납세능력이 높았는데, <코닌식>(弘仁式[1])에 기록된 대여(出挙)한 벼의 숫자를 보면, 큐슈 총 459만 다발 중 123만 다발을 히고국이 차지했다. 그 덕에 공영전제(公営田制) 도입에 있어서, 히고국은 엔랴쿠(延暦) 14년(795년)에는 국 등급구분이 ‘상국’에서 ‘대국’으로 승격돼, 그 중심을 담당하는 위치의 나라가 됐다.
これら租税徴収および軍事など地方行政を遂行するため、肥後国にも条里制が布かれ、郡家(郡衙)や駅路・車路(くるまじ)が整備された。ただし、記録に残る条里制の区域は、一部阿蘇カルデラ内を除き菊池川流域および熊本平野に集中し、「コ」の字形に配列された掘立柱が特徴的に見られる郡衙遺構もそれらの中心を占める形で発掘されている。路は筑紫国から下り、熊本平野を南北に貫いて馬屋である益城駅に続く。現在の熊本市北部(旧地名「子飼町」)には、繭綿輸送の中継点であった「蚕養駅(こかいえき)」が設置された。
이러한 조세 징수 및 군사 등 지방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히고국에도 조리제(条里制, 토지 구획법)이 보급되어, 군가(郡家, 또는 군아(郡衙)), 역로, 차로가 정비됐다. 다만 기록에 남아 있는 조리제의 구역은 일부 아소 칼데라 내를 제외하고 키쿠치천 유역과 쿠마모토 평야에 집중되어 있다. ‘コ’자형으로 배열된 굴립주(掘立柱, 땅속에 박아 세우는 기둥)가 특징적으로 보이는 군아의 유구도 그 중심을 차지하는 형태로 발굴되고 있다. 길은 츠쿠시국(筑紫国[2])에서 내려와 쿠마모토 평야를 남북으로 관통해 역참(馬屋)인 마시키역으로 이어진다. 현재의 쿠마모토시 북부(옛 지명 ‘코카이정’(子飼町))에는 겉풀솜 수송의 중계점이었던 코카이역(蚕養駅)이 설치됐다.
肥後国はまた、朝廷や駅馬・伝馬に用いられる馬を供給する「牧」を担い、『延喜式』には二重牧(ふたえまき、阿蘇外輪山を挟み阿蘇町と大津町に跨る)と波良牧(はらまき、小国町一帯と推測される)、さらに『日本三代実録』には大宅牧(おおやけまき、宇土半島)が記録されている。また山鹿市に残る昔話に、大田畑を誇る米原長者がやはり大地主の駄の原長者と宝くらべを行い、金銀財宝を積み上げた米原長者に対し凛々しい子息らと美しい子女らを並べた駄の原長者に民衆が軍配を上げる話がある。この駄の原長者は数百頭の牛馬を持ち、官道への駅馬供給を担った実力者であったと推測されている。
히고국은 또한, 조정이나 역마, 전마(伝馬)로 사용되는 말을 공급하는 목장의 역할을 했다. <엔기식>(延喜式)에는 후타에 목장(二重牧, 아소 외륜산을 끼고 아소정과 오즈정에 걸쳐있음)과 하라 목장(波良牧, 오구니정(小国町)일대로 추정됨), 그리고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에는 오야케 목장(大宅牧, 우토 반도)이 기록돼 있다. 또한 야마가시(山鹿市)의 옛날 이야기 중에 큰 논밭을 자랑하는 요나바루 장자(米原長者)가 역시 대지주인 다노바루 장자(駄の原長者)와 보물 대결을 벌인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금은보화를 쌓아올린 요나바루 장자에 맞서 씩씩한 아들들과 아름다운 딸들을 앞세운 다노바루 장자 쪽으로 민중이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이 다노바루 장자는 수백 마리의 우마를 가졌고, 관도(官道)에 역마 공급을 담당한 실력자였다고 추측된다.
白い亀 흰 거북이
神護景雲元年(768年)、肥後国葦北郡から白い亀が朝廷に献上された。3年後にも同じ例があるが、こちらは歴史に大きく関与した。神護景雲4年(771年)8月に葦北郡と益城郡の二箇所から白亀が献上されたが、同月は称徳天皇が没した月と重なり、天智系の光仁天皇が即位した時でもあった。大瑞を示す亀の出現を受けて10月に元号が「宝亀」に改められ、権勢を誇った道鏡は失墜した。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768년), 히고국 아시키타군(葦北郡)에서 흰 거북이를 조정에 헌상했다. 3년 후에도 같은 사례가 있는데, 이 일은 역사에 큰 영향을 줬다. 진고케이운 4년(771년) 8월에 아시키타군과 마시키군의 2곳에서 흰 거북이 헌상됐다. 이 달은 코켄 천황(称徳天皇)이 죽은 달이자, 텐지(天智) 계열의 코닌 천황(光仁天皇)이 즉위한 때이기도 하다. 큰 길조를 나타내는 거북의 출현에 따라 10월에 원호가 ‘호키’(宝亀, 보석 거북이)로 바뀌면서, 권세를 자랑하던 도쿄(道鏡)의 위신은 실추됐다.
この二度目の白亀献上は、『続日本紀』によると国司である肥後守・大伴宿禰益立が行った。宝亀3年(773年)にはまたも白亀を献上した肥後国は、瑞祥を示すことで天武系から天智系への転換を後押しし、そこには大伴氏の関与があったものと推測されている。ただし、藤原種継暗殺計画に関与したとして大伴家持の一族が処罰されると、肥後国司の系列に大伴の名は見られなくなり、藤原氏系列がその職を得ることとなった。
771년의 흰 거북 헌상은, <속일본기>에 따르면 국사인 히고노카미 오토모노 스쿠네 마스타테(大伴宿禰益立)가 한 일이다. 호키 3년(773년)에 또다시 흰 거북을 헌상한 히고국은, 상서로움을 나타냄으로써 텐무(天武)계에서 텐지계로의 전환을 뒷받침했다. 거기에는 오토모씨의 관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후지와라 타네쯔구(藤原種継) 암살 계획에 관여했다고 하여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 일족이 처벌받았다. 그 이후 히고 국사의 계열에는 오토모의 이름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후지와라씨 계열이 그 직을 맡게 됐다.
사진출처
* 굴립주
* 코카이 상점가
[1] 式(시키) : 율령을 보완하는 목적의 법령집의 하나로, 율령의 시행세칙을 담았다. '코닌식'은 코닌 연간의 법령집을 뜻함.
[2] 筑紫国 : 현재의 후쿠오카현의 서쪽에 해당하는 부분(동쪽은 부젠국)으로, 645년 다이카 개신과 율령제에 따라 율령국인 치쿠젠, 치쿠고국으로 분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