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현의 역사 19 -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된 히고
각축장이 된 히고
일단 평안을 찾은 오토모씨의 지배도 머지 않아 균열이 생겼다. 히고는 여러 세력이 각축장(草刈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에이로쿠 2년(1559년), 현재의 키쿠치정에서 각자가 국인으로서 독자성을 내세운 구 키쿠치 가신 사이의 권력다툼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아카호시 치카이에(赤星親家)가 아와세가와(合勢川)의 전투에서 쿠마베 치카나가(隈部親永)에게 패하자, 그 아들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統家)는 오토모씨에게 의탁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쿠마베씨는 히젠의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태는 텐쇼 6년(1578년) 11월, 미미카와강의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패배하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류조지씨는 이것을 호기로 여기고 남하를 개시하여, 2년 후에는 히고에 다다랐다. 타카노부는 쯔쯔카타케성(筒ヶ嶽城, 아라오시)의 쇼다이 치카타다(小池親伝[2])를 항복시키고, 그의 차남인 에가미 이에타네(江上家種)를 대장으로 하는 군대는 쿠마베씨와 공동전선을 폈다. 이들은 나가사카성(長坂城, 야마가 시)로 나가 아카호시 측의 호시코 나카쯔카사 카도마사(星子中務廉正)의 군대를 공략했다.
이듬해, 류조지씨는 적자 마사이에(政家)를 대장으로 삼아 다시 군대를 진출시켰다. 아카호시 치카이에는 인질을 보내고 항복한 뒤 키쿠치성에서 퇴거했다. 그 뒤로 쿠마베 치카나가가 입성하면서 히고 북부의 지배권은 오토모씨에서 류조지씨로 넘어갔다.
한편, 쿠마모토성(隈本城)을 지키던 죠 치카마사(城親賢)는 류조지・쿠마베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오토모씨가 아니라 사쯔마의 시마즈씨와 손을 잡았다. 시마즈씨와 국경을 접한 사가라씨는 에이로쿠 5년(1562년)에 키타하라씨의 영지 회복을 위해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와 맹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사가라씨는 이듬해, 휴가국(日向国)의 이토씨(伊東氏)와 연계하여 시마즈씨의 다이묘진성(大明神城)을 떨어뜨렸다.
이로 인해 양자의 관계가 악화돼, 타카히사의 뒤를 이은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에이로쿠 12년(1569년) 히시카리씨(菱刈氏)의 원군으로 오오쿠치(大口)에 있었던 사가라 세력을 쫓아냈다. 그 후, 시마즈씨는 텐쇼 6년(1578년)까지 사쯔마국, 오스미국, 휴가국을 연이어 통일하고, 이어서 미미가와강(耳川)의 싸움에서 오토모씨를 격파하여 북진의 발판을 굳히고 있었다.
텐쇼 8년(1580년) 죠씨의 요구에 응해 시마즈 요시히사는 사타 히사마사(佐多久政), 카와카미 타다토모(川上忠智)를 히고에 파견했다. 이들은 쿠마모토성을 거점으로 삼고, 오토모쪽에 붙은 야자키성(矢崎城, 미스미정)의 나카무라 코레후유(中村惟冬)를 공격해 쳐부수고, 이어 코시 치카타메(合志親為)가 굳게 지키는 타카바성(竹迫城)도 공략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마즈씨의 원정은 사가라씨의 영지인 아시키타와 야쯔시로를 해로로 넘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이 때는 본격적인 공격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뜻하지 않게 히고의 방파제가 된 사가라씨는, 큐슈 제패를 노리는 시마즈씨의 격렬한 공격을 받게 된다. 텐쇼 8년 9월, 시마즈 측은 니로 타다모토(新納忠元)를 장수로 하는 군대로 미나마타성을 공격해 1년간의 공방전 끝에 함락시켰다. 사가라 요시히(相良義陽)는 아시키타의 일곱 포구(葦北七浦)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시마즈씨는 사가라씨에게 아소씨 공략의 선봉을 명했다. 사가라 요시히는 과거 맹우 사이였던 아소 측의 카이 치카나오(甲斐親直 혹은 소운(宗運))과 히비키노하라(響野原)의 전투에서 창을 맞댈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서 요시히는 전사한다.
아소씨, 야베의 거점을 잃다
류조지의 휘하에 있었던 히젠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는 시마즈씨와 내통하고 있었다. 텐쇼 12년(1584년) 초,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는 배신자를 징벌하기 위해 병력을 시마바라로 보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이것을 호기로 보았다. 3월, 대장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이하의 대군을 히젠으로 진격시켜, 류조지씨와의 결전(오키타나와테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 임한 시마즈 측은 격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고 히고의 패권을 수중에 넣었다.
역시나 히고 무사는 반항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9월 8일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야쯔시로에 도착하고, 12일에는 쿠마모토성에 입성했다. 쿠마베 치카야스(隈部親泰) 등 히고 북부의 국인들도 공순의 뜻을 표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오토모씨와 연계하고 있던 아소씨만 이에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소측의 지장 카이 치카나오가 텐쇼 13년(1585년) 7월 3일에 죽자 시마즈씨는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에후네의 타시로 요시타카(田代快尊)・무네쯔타(宗傳) 부자 등 아소 측 세력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이듬해에는 아소의 본거지 야베를 함락시켜 히고 제압을 완성했다.
시마즈씨는 카고시마의 타네가섬(種子島)에 전래된 철포를 주무기로 삼아 큐슈 각지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시마즈씨는 야쯔시로를 거점으로 삼고, 각 요충지에 휘하의 수하들을 두어 히고 지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점령한 휴가국에서처럼 지두직에 가신들을 앉히고, 그 휘하에 지역의 무사단을 두어 군사조직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서로 다른 통치수법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와리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