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20 -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kumamon.kr 2024. 11.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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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의식을 행하는 일본인과 서양 선교사들의 모습. 카노 나이젠(狩野内膳)의 '남만인 도래도(南蛮人渡来図)'의 일부.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전국시대는 아마쿠사에도 찾아와 각 씨족은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에이로쿠 3년(1560년), 스모토씨(栖本氏)를 공격한 코쯔우라씨(上津浦氏)를 지원한 마쯔라 타카노부(松浦隆信)가 도입한 철포대의 위력이었다. 아마쿠사의 각 가문은 그 유효성을 인정하고 철포를 도입하기 위해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시키 시게츠네(志岐鎮経)는 쿠치노츠(口之津)의 일본 포교장(布教長)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루이스 드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시키(志岐)로 떠나 교회당을 지었다. 또한 그는 시게츠네에게 세례를 실시하여 ‘돈 조안’이라는 세례명을 줬다.

이 교회당은 일본 포교의 일대 거점이 되어, 에이로쿠 11년(1568년)에는 일본 각지의 선교사들이 여기에 모여 회의를 했다. 겐키(元亀) 원년(1570년)에는 토레스가 은퇴하고 프란시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로 포교장 인계가 이뤄졌다. 시키씨의 영지인 토미오카항(富岡港, 현 아시키타 정)에는 카브랄과 함께 그네키-솔도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도 상륙했다.

 

아마쿠사에 교회당을 지은 루이스 드 알메이다(가운데)

그러나 뒤에 시키 시게쯔네는 배교하고 기독교도를 박해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 배경에는 토레스의 죽음, 후임인 카브랄과의 성격 차이, 가신과 무역선원 사이에 생긴 갈등 등이 있었다. 하지만 남만무역의 본거지가 나가사키로 옮겨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가 저술한 <일본사>에서 시게쯔네는 평판이 아주 나쁘게 적혀 있다.

시키씨를 대신해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아마쿠사 후미나오(天草鎮尚, 세례명 미겔)이었다. 그는 겐키 2년(1571년, 에이로쿠 12년이라고도 한다) 알메이다를 초청해, 적남인 히사타네(久種, 세례명 조안) 이하 가신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시모시마섬 중남부를 기점으로 아마쿠사 제도 전역에 기독교가 퍼졌다.

 

사진출처

* 일본인과 서양 선교사의 기독교 의식 (위키미디어)

* 루이스 드 알메이다 (위키미디어)

 

주석

* 口之津(쿠치노츠) : 현재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의 지명.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미나미시바마라 시(南島原市)
* 志岐(시키) : 지금의 아마쿠사 군 레이호쿠 정(苓北町)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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