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22 -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과 쿠마모토

kumamon.kr 2024. 11.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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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로부터 히고 1국을 받았던 삿사 나리마사의 초상

근세의 시작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통일

 

일본사에서 일반적으로 근세는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上洛)을 기점으로 한다. 하지만 히고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을 시작으로 보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3월,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들어온 히데요시는 이후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4월 11일에는 히고 난칸(肥後南関), 16일에는 쿠마모토성, 19일에는 야쯔시로성, 26일에는 미나마타성에 이르렀다. 5월 8일에는 이즈미(出水)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이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니로 타다모토(新納忠元)를 항복시키고 발길을 돌려 6월 2일에는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히고의 국인 52명에게 본령안도(本領安堵[1])의 서장을 보내는 동시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에게 히고 1국을 주었다. 같은 달 7일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게 치쿠젠과 치쿠고를,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에게 부젠의 6군을 줬다. 큐슈 각국의 분배를 마친 히데요시는 오사카로 돌아갔다.

삿사 나리마사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쿠마베 치카나가의 동상(야마가 시 키쿠카 정)

히고에 입국한 삿사 나리마사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맹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삿사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반발하여 몇 차례 반기를 들었다가 항복하기를 거듭했다.

그러한 나리마사가 히고국을 받은 것은 의외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큐슈 원정 중인 5월에 히고의 국인 사가라 요리히사(相良頼房)와 오야노 타네모토(大矢野種基)가 수령한 본령 안도의 증명서(朱印状)에는 ‘하시바 무츠노카미(羽柴陸奥守, 즉 삿사 나리마사)에게 요리키(与力[2])시키다’라고 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 이미 나리마사에게 관직과 하시바 성이 수여된 것을 보면, 히데요시는 이 때 이미 나리마사에게 히고를 통치하게 하려고 예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6월 2일에는 나리마사를 시종(侍従[3])으로 임명하고, 히고국인 52인에게 보낸 서장에서도 영지의 목록을 나리마사에게 받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아, 히데요시는 나리마사에게 기대를 걸었던 걸로 보인다. 또한, 히데요시는 히고통치에 대하여 봉기(一揆)가 일어나지 않게 할 것, 국인의 영지 안도, 3년간 검지 금지 등을 엄명한 5개 조의 정서(定書[4])를 내렸다. 그 수신인은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로 되어 있는데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논란이 있다.

 

‘난치의 나라’로 알려진 히고의 행정에 나선 삿사 나리마사는 영지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각 국인에게 영지의 검지를 요구했다. 주인장(朱印状)에 따르면, 본령 안도에는 나리마사를 따라 목록을 받는 것이 조건으로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국인들은 이런 식의 주종관계(寄親・寄子[5])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는 히데요시가 보장한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장 먼저 반발의 태도를 보인 것은 쿠마모토성을 거점으로 하던 쿠마베 치카나가(隈部親永)였다. 그는 주인장을 방패삼아 검지를 거부했고, 이른바 히고국인의 봉기가 발발했다.

8월 6일, 나리마사는 조카인 삿사 무네요시(佐々宗能)를 시켜 반란을 토벌하려 했으나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자 나리마사는 가신을 통해 징집한 국인들을 더해 총 6000명의 군세로 쿠마모토성을 공격했다. 치카나가는 아들인 야마가 치카야스(山鹿親安)의 죠무라성(城村城)에 들어가 여기에서 농성했다. 이어 히고 내의 국인들에게 격문을 날렸다.

 

이에 호응한 것은 미후네성(御船城)의 카이 치카후사(甲斐親房)・치카히데(親英)였다. 아카호시씨, 죠씨, 타쿠마씨 등 유력한 국인도 이에 합류하여 총 3만5000명의 봉기군은 쿠마모토성으로 향했다.

이 보고를 받은 삿사 나리마사는 와이후성(隈府城, 키쿠치성)에 부속성(付城)을 쌓고, 급히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나리마사는 쯔보이 강(坪井川)에서 봉기군을 깨뜨렸으나, 와이후에서는 삿사 무네요시(佐々宗能)가 쿠마베 측의 우치쿠가 시게후사(内空閑静房)에게 패해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타나카 성(田中城, 키쿠치군)에서 와니 사카자네(和仁親実)와 헤바루 치카유키(辺春親行) 등도 900명의 사병으로 궐기했다. 나리마사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야나가와(柳川)의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는 2000명의 군사를 와이후 성으로 보냈고, 타나카 성에도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나베시마 씨(鍋島氏) 등이 공격해 왔다.

 

봉기의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12월, 인접한 여러 다이묘에게 출병을 명해 히고 진압과 국인 섬멸을 지시했다. 대군에 둘러싸인 쿠마베 치카나가・치카야스는 항복했으나 처형당했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와니 치카자네(和仁親実) 등 가신들의 충절을 칭송했으나, 히데요시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모조리 처벌했다.

또한 텐쇼 16년(1588년)에는 아사노 나가요시(浅野長吉)를 비롯해 휘하 장수 8명과 2만명의 병력을 히고에 보내, 잔당을 이잡듯 뒤지고 검지를 실시하는 등 통치를 시행했다. 히데요시는 봉기 발발의 책임을 삿사 나리마사에게 물었고, 나리마사는 윤5월 14일 아마가사키(尼崎[6])에서 할복하게 된다.

 

주석

[1] 本領安堵(본령안도, 혼료안도) : 일본 중세 시대에 중앙 권력자(쇼군 등)가 고케닌이 그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토지의 영유권을 보증해 주는 행위.

[2] 与力(요리키, 여력) : 주종관계에서 종(従)의 위치에 있는 자

[3] 侍従(시종, 지쥬) : 율령제의 관직 중 하나로 관위는 종5위하. 중세 시대에는 천황의 측근에서 봉사하는 관직이었다.

[4] 定書(정서, 사다메가키) : 에도 시대에 막부나 각 번이 발표한 법령이나 규칙. 다른 말로는 법도서(法度書, 핫토가키)라고도 한다.

[5] 寄親・寄子(기친・기자, 요리오야・요리코) : 중세 일본에서 주종관계를 부자관계에 빗대어 표현한 것. 요리오야는 다른 말로 指南(지남, 시난)、奏者(주자, 소샤)라 부르며, 요리코는 与力(여력, 요리키)、同心(동심, 도신)이라고도 부른다.

[6] 현재의 효고현 남동부의 아마가사키 시(尼崎市)

 

사진 출처

 

* 삿사 나리마사(위키미디어)

* 쿠마베 치카나가(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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