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23 - 히고의 반란군 사후처리

kumamon.kr 2024. 11.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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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성 근처에 있는 카토 키요마사 동상

 

히고의 잔당 사후처리

 

삿사 나리마사가 할복한 다음날, 히데요시는 히고를 양분해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주었다.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성에 근거하며 히고 북부 19만 5천 석의 영지를 받고, 영내에 모리모토 카즈히사(森本一久) 등을 배치했다. 또한, 요리키(与力)로서 활동했던 국인, 삿사의 구신, 영내와 타국의 낭인 등을 불러들였다. 한편, 유키나가는 우토성을 거점으로 하고, 히고 남부와 아마쿠사 14만 5천석을 영유하면서 자신의 직신을 요지에 배치했다.

히토요시의 사가라씨는 히데요시 진공 시에 시마즈씨를 편들었으나, 가신 후카미 소호(深水宗方)의 끈질긴 교섭으로 화를 면했다. 비록, 야츠시로(八代)와 아시키타(葦北)를 잃기는 했으나 히토요시의 본령은 안도되었다. 하지만 사가라씨는 봉기 당시에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봉기 진압에 나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이쥬인 타다무네(伊集院忠棟)의 군세를 사시키에서 발묶이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는 삿사 나리마사가 시마즈 군이 자신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 것으로 착각해 그 발을 묶을 것을 사가라 가문에 의뢰한 데 따른 행위였다.

타다무네는 이시다 미츠나리,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에게 “사가라의 군대 저지행위는 봉기 행동이므로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가 오사카에 올라왔을 때 이를 규탄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미츠나리와 후지타카도 사가라씨의 행위를 역심으로 판단하고 요시히로가 상경했을 때 그 당시의 사정을 히데요시에게 들려줄 심산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히데요시도 사가라씨의 행동에 격노했으나, 후카미 소호가 오사카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사죄한 덕에 이를 용서했다. 결과적으로 사가라씨는 영지를 안도받았다.
 
국인의 봉기 때 삿사 쪽으로 가담했던 아마쿠사 5인중(天草五人衆)은 텐쇼 17년(1589년)에 코니시 유키나가가 우토성 개축(普請[1])을 위한 자본 공출을 명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시키 린센(志岐麟泉)이 코니시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궐기했고, 아마쿠사 타네모토(天草種元)・코츠우라 타네나오(上津浦種直)・오야노 타네모토(大矢野種基)・스모토 치카타카(栖本親高)도 이에 동조해 봉기를 일으켰다. 유키나가는 3000명의 병사를 보냈으나, 아마쿠사 5인중의 연합군은 5600명의 병사를 모아 후쿠로우라(袋浦, 지금의 토미오카)에서 코니시군을 격파했다.

유키나가는 카토 키요마사 및 히젠의 아리마(有馬)씨, 오무라(大村)씨로부터 응원군을 얻어 포위망을 형성하고 공격해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키요마사가 가장 활약했으며, 유키나가는 같은 키리시탄의 정이 작용했는지 뒤에서 아마쿠사 5인중에게 투항을 권했다. 하지만 봉기군은 혼도성(本渡城)에 틀어박혀 철저한 항전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결국 많은 이가 전사했다. 시키 린센은 사츠마로 도망쳤고, 다른 네 가문은 결국 항복하고 유키나가의 가신단으로 편입됐다.

코니시 유키나가를 그린 1867년의 우키요에 작품 / 落合芳幾 作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키요마사, 유키나가, 사가라씨 등 큐슈와 히고의 각 다이묘가 조선으로 출병한 틈을 타, 텐쇼 20년(1592년) 시마즈의 가신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国兼)와 타지리 타지마(田尻但馬) 등은 이른바 우메키타 봉기(梅北一揆)를 일으켰다. 이들은 히고의 사시키성(아시키타 정)에 틀어박혀 주변에도 궐기를 촉구했으며, 이어 야츠시로에도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현지의 유력자들은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사가라씨 등 진압군 측이 우세함을 보이자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던 지역 유지들은 반(反)봉기군 측에 가담했고, 결국 우메키타 등은 패퇴했다.

나고야에서 봉기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와 그 아들인 요시나가(幸長)를 파견해 봉기를 진압하고 지방의 여러 성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게 했다. 더욱이 봉기가 종결된 후에는 시마즈 토시히사(島津歳久)와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하여 단죄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 세력의 강화[2]와 잠재적인 반란분자 억제라는 결실을 일거에 수중에 넣었다.

 

사진 출처

* 카토 키요마사상 - 일본어 위키백과

* 코니시 유키나가 그림 - 위키미디어

주석

 

[1] 普請(보청; 후신) : 집, 길, 다리, 수로, 제방 등을 짓거나 수리하는 행위로 본디 불교에서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일에서 나온 말.
[2] 문맥상 히데요시가 히고에 배치한 카토, 코니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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