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현의 역사 25 - 아마쿠사의 상황
옛 코니시(小西)령 중 아마쿠사는 쿠마모토번에 포함되지 않았고,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의 히젠 카라츠(肥前唐津)번의 월경지가 되었다.
아마쿠사는 한때 쿠마모토 번령이었지만, 열성적인 법화경(法華経, 妙法蓮華経, 묘법연화경)의 신자였던 카토 키요마사는 키리시탄이 뿌리내린 이곳을 싫어했기에 아마쿠사와 붕고(豊後)의 츠루사키(鶴崎)와의 교환을 신청해 케이쵸 8년(1603년)에 이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케이쵸 6년에 쿠마모토 번령 중에 아마쿠사가 없고 츠루사키가 있었으며, 히젠 카라츠번이 아마쿠사를 지배하고 있던 증거가 발견되어 위 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발포된 신부(バテレン) 추방령 이후에도 코니시 유키나가 휘하였던 아마쿠사 영주들에 의한 기독교 보호는 계속되어 아마쿠사 제도는 키리시탄의 본거지가 되어간다.
오토모씨(大友氏)가 쇠퇴함에 따라 붕고에 있던 노비샤드(수련원)와 코레지오(대신학교)가 아마쿠사로 옮겨가, 카와치우라(河内浦)에 노비샤드와 아마쿠사 코레지오가 세워졌다.
또한 예수회 사제와 수도사들이 체재하면서 포교를 하는 한편, 활판인쇄기를 도입해 <이솝 이야기>와 <헤이케 이야기>, 사전 등의 출판활동도 이뤄졌다.
분로쿠 원년(1592년)에는 아마쿠사의 4개 소에 레지덴시아(사제관)가, 케이초 4년(1599년)에는 나가사키에서 옮겨온 세미나리요(소 신학교)가 시키(志岐)에, 그리고 이듬해에는 천주당이 7개 소에 건설됐다. 아마쿠사 제도 주민의 과반수는 기독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한때 세례를 받고 예수회에 협력적이었으나, 케이초 9년(1604년)에는 태도를 바꿔 탄압하는 입장이 됐다. 이 태도 변화는 순수한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케이초 18년(1613년) 막부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자, 테라자와 씨는 선교사를 외국으로 추방하고 레지덴시아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키리시탄의 지도자들은 개종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고, 일반 신자들도 관리들로부터 개종을 강요받았다.
한편으로 테라자와 씨는 아마쿠사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 방침을 내렸다. 히젠 카라츠번에 의한 검지(檢地)의 결과 아마쿠사의 석고는 쌀 수확량으로 3만 7천석(기타 상품작물이나 어업, 염업 등 5천석이 있어 아마쿠사의 총 석고는 4만 2천석)으로 책정됐다.
이는 아마쿠사의 실력과 관계없는 과대평가로, 그 배경에는 테라자와씨가 자신의 번을 더 크게 보이게 하려는 허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민에게는 어디까지나 석고에 상당하는 조세가 부과됐고, 거의 같은 상황이었던 시마바라(島原)의 영민들도 착취에 시달렸다.
시마바라의 난은 칸에이 14년(1637년) 10월, 시마바라의 지방관 관사 습격으로 시작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오야노(大矢野)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코니시 유키나가의 구신 마스다 요시츠구(益田好次)의 아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를 ‘마마코스 상인(마르코스 페레이라 신부를 가리킴)이 예언한 천동(天童)’이라 받들고 봉기했다.
소식을 접한 카라츠번은 1500명의 군사를 파견했으나, 봉기군 측은 이를 격파하고 혼도(本渡)에 진출했다. 이어 아마쿠사 지배의 본거지 토미오카성(富岡城)을 에워쌌다. 그러나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이윽고 쿠마모토 번에서 토벌군이 온다는 소식이 나돌자 일행은 시마바라로 돌아갔다.
그 후, 이들은 하라성(原城)터에서 농성했으나 큐슈 각 번에서 온 군대의 총공격에 노출돼, 단 한명의 내통자를 제외한 전부가 토벌되어 죽었다. 아마쿠사 시로를 죽인 자는 쿠마모토 번의 진사사에몬(陳佐左衛門)이었다.
난 이후, 시마바라의 마츠쿠라씨는 개역됐고, 아마쿠사는 테라자와씨에서 빗츄국 나리와번(成羽藩)의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의 영지로 바뀌었다.
이 때, 나리와번에 의한 조사에서 쌀의 석고 3만8732석 중 6732석이 없어지고 3302석이 파괴됐다고 한다. 이에하루는 토미오카 성 수축 등에 나섰으나, 칸에이 18년(1641년) 사누키국 마루가메번(丸亀藩)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아마쿠사는 천령(天領, 막부 직할령)이 되어, 지방관인 대관에는 스즈키 시게나리(鈴木重成)가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