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만도시의 발달
중세 후기 일본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교역도 활발해졌다. 히고에도 외국까지 알려진 항만도시가 발달했다.
타카세(高瀬, 현 타마나시)는 하쿠자키궁(筥崎宮)령에 속하며, 키쿠치강과 하네기강(繁根木川) 하구에 낀 교통의 요지였다. 카마쿠라 시대에는 시종(時宗[1])의 간교사(願行寺) 등이 건립됐고, 명나라에 도해하기 전에 젯카이 츄신(絶海中津)도 들렀다고 한다.
죠와(貞和) 3년/코코쿠(興国) 7년(1347년)에는 키쿠치 타케미쯔(菊池武光)의 동생 타케히사(武尚)가 호타기성(保田木城)을 쌓고 이후 타카세씨를 자칭했다. 타카세씨는 간교사를 비롯한 불각(仏閣)에 기부하고, 마을 정비 등에 힘써 객주(問屋)[2] 마을과 직인 마을의 형성에 기여했다. 조선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뤄졌는데, 나중에 타카세강 바닥에서 발견된 중국의 청자류에서도 그 번영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키쿠치 요시카즈(菊池能運)가 우토 타메미쯔(宇土為光)를 토벌했을 때에 타카세 타케모토(高瀬武基)가 전사하자, 호타기성은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됐다. 이곳은 후에 오토모씨의 히고 지배기 때 자치도시로서의 성격을 강화했다.
아시카가 타다후유를 맞이한 카와시리 유키토시(河尻幸俊)가 거점으로 삼은 카와시리도 시라카와강과 미도리카와강의 하구 지역의 항만도시로 번영했다.
에이쇼 14년(1517년)에 이곳을 방문한 연가사인 소세키(宗碩)는 “천 대의 배가 모여드는 강과 뿔뿔이 흩어지는 버드나무 그늘”(千舟より川やちりはう柳かげ[3])이라고 카와시리의 모습을 읊었다.
오에이 연간에 카와시리씨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카와시리는 특정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계’(公界[4])로서 성격을 강화했다. 텐분(天文) 8년(1539년) 키쿠치 측과 사가라 측은 이해조정의 회담장을 카와시리에 세웠다. 또한 시마즈 이에히사 일행이 상경하던 도중 카와시리를 지나면서 통행세(関銭)를 지불했는데, 이런 일들은 ‘공계’ 카와시리에서만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선교사 알메이다는 에이로쿠 7년(1564년)의 편지에서 카와시리를 가리켜 ‘커다란 마을’이라는 기술을 남겼다.
켄무(建武) 신정에서의 논공행상에서 지두직을 얻은 나와 요시타카(名和義高)는 야쯔시로로 들어가 야쯔시로 성을 쌓았다. 이후 야쯔시로는 성하마을(城下町) 및 야쯔시로 신사의 문전마을(門前町)로써 번영했다.
사가라씨가 다스릴 때는 외항인 토쿠부치우라(徳淵浦)를 기점으로 하는 무역으로 야쯔시로는 번성했다. 사가라 요시시게(相良義滋)와 하루히로(晴広)는 무역선 ‘이치쿠루마루’(市来丸)를 건조해 주로 류큐 무역을 했다. 마을 주민(町衆)들의 중국 무역도 활발했다.
아소가의 본거지, 야마토정 ‘하마노야가타’의 출토품
이들 도시로 대표되는 교역활동이 가져온 결실의 일부가 아소씨의 본거지였던 야베정(현 야마토정)에서 발견됐다. 1973년(쇼와 48년), 쿠마모토현 교육위원회는 현립 야베 고등학교 부지를 조사하여, 건물 및 정원 유적을 발굴했다. 이어서, 황금 연판, 백자, 청자, 청화, 삼채, 녹유 등의 도자기들이 출토됐다. 이들은 대부분 수입품이었고, 이 유적은 아소씨의 본거지인 ‘하마노야가타’(浜の館)였던 걸로 파악된다. 출토품 21점은 ‘히고 아소씨 하마어소 유적 출토품’(肥後阿蘇氏浜御所跡出土品)이란 명칭으로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사진출처
주석
* [1] 時宗(시종; 지슈) : 카마쿠라 시대 말기에 흥했던 정토종의 한 종파.
* [2] 問屋(문옥; 톤야, 토이야) : 카마쿠라, 무로마치 시대 때, 주로 항만에 살면서 화물의 보관, 수송, 중개 매매를 하던 업자
* [3] 역자가 일본 고전시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이 문장의 경우 정확한 번역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원문 문장을 「千舟寄り川や散り這う柳かげ」로 보았음
* [4] 公界(공계; 쿠가이) : 남북조 시대의 경우 ‘公’은 오늘날과 달리 국가 권력이 아니라 사회나 세상 일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당시 사람들은 주종 관계 등으로 묶여 있었는데, ‘공계’는 이러한 관계에서 분리되거나 자립한 사람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대표적인 공계자(公界者)로는 連歌師가 있다.
* [5] 延板(연판; 노베이타) : 금속을 두드려 늘여서 판자 모양으로 만든 것
* [6] 染付(염부; 소메쯔케) : 백자 위에 청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의 일종. 한국에서는 주로 청화(靑華/靑花)라 부름.
* [7] 三彩(삼채; 산사이) : 낮은 화도에서 녹는 잿물을 발라서 구운 도기의 일종으로, 녹황백의 세 가지 빛깔을 띈다. 성당 시대의 당삼채가 유명하다.
* [8] 緑釉(녹유; 료쿠유) : 구리에 납을 넣어 녹여서 녹색을 띠게 만든 잿물의 일종이자 그것을 칠해 만든 도자기를 가리킨다. 중국 당송 시대에 화북 지방에서 널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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