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쿠마모토 스토리34

시정촌 통폐합 20년, 쿠마모토 대부분 지역에서 인구 감소세… 현 남부 감소세 특히 심각 일본에서는 '헤이세이 대합병'이라 불리는 시정촌(한국의 기초자치단체에 해당) 통폐합이 있었다. 쿠마모토 현내에서는 2003년 4월 아사기리초(あさぎり町)를 기점으로 17곳의 새로운 시정촌이 탄생했고, 기존의 시정촌 94곳이 45곳으로 재편됐다. 2025년은 시정촌 통폐합이 20년을 맞는 해다. 쿠마모토 일일신문(쿠마니치)의 조사 결과, 전체의 80% 이상의 시정촌에서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쿠마니치는 '헤이세이 대합병' 직전인 2003년의 시정촌 94곳의 인구를 합병 이후인 2024년의 인구와 비교 조사했다. 이 중 인구가 증가한 곳은 14곳, 감소한 곳은 80곳이었다. 인구 증가율 52.0%로 1위를 차지한 곳은 키쿠요 정(菊陽町)이다. 이어서 토미아이 정(富合町, 현 쿠마모토 시)가 38.5.. 2025. 1. 28.
쿠마모토현의 역사 27 - 에도 시대의 쿠마모토, 아소, 야마가와 테나가 제도 에도시대 쿠마모토 번과 테나가 제도 쿠마모토 번은 칸에이 12년(1635년), 영내 전역에 ‘테나가’(手永)라는 지방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각 테나가를 관할하는 총쇼야(惣庄屋)[1]를 두었다. 이 테나가란 군과 촌의 중간에 해당하는 구분으로, 호소카와 씨가 부젠코쿠라 번(豊前小倉藩[2]) 시대부터 시행해 온 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총쇼야에는 대부분 대쇼야(大庄屋)나 옛 키쿠치, 아소 씨의 가신 등이 임명됐고, 각각의 테나가에는 회소(会所)[3]라 불리는 관공서가 설치됐다. 거기서 총쇼야는 연공의 청부나 민정의 운영을 맡았다.  당초 테나가는 영내에 100개소 이상 설치됐으나, 통폐합을 거듭해 죠오(承応) 2년(1653년)에는 59개, 그리고 나중에는 51개까지 줄어들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러 테나가.. 2025. 1. 8.
쿠마몽의 뒤를 이을 쿠마모토 캐릭터 '치쿠왕' 지난 11월 3일, 이시카와현 나나오시(石川県七尾市)에서 열린 제2회 '유루바스'(ゆるバース) 대회에서 쿠마모토현 야츠시로시의 대표적인 온천마을 히나구(日奈久)의 캐릭터 '치쿠왕'(ちくワン)이 4만6570표를 얻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유루바스는 과거 유루캬라 그랑프리(ゆるキャラグランプリ)를 계승한 대회로, 2011년 제1회 유루캬라 그랑프리에서 쿠마몽이 우승을 차지한 바 있습니다. 치쿠왕의 우승은 13년 만의 일입니다. 치쿠왕은 9년 전 히나구의 특산물인 치쿠와(ちくわ)에 개를 접목시킨 캐릭터입니다. 치쿠와(ちくわ、竹輪)는 뚫린 원통 모양의 어육 연제품입니다. 이름의 '왕' 부분은 일본어로 개가 짖는 소리입니다. 한국어로 치면 '멍멍이'의 '멍' 정도가 됩니다. 쿠마몽이 유튜브 '쿠마몽TV'를 통해 홍.. 2025. 1. 6.
쿠마모토현의 역사 26 - 히토요시 번의 성립, 호소카와의 입국 히토요시번의 성립 히데요시가 큐슈를 통일할 때에 사가라 가문의 존속에 분주했던 후카미 소호(深水宗方)는 자신의 후계 봉행(奉行)으로 인도 요리야스(犬童頼安)의 적자인 인도 요리모리(犬童頼兄)를 지명했다. 하지만 일족의 반대에 부딪힌 요리야스는 요리모리와 함께 자신의 조카인 후카미 요리쿠라(深水頼蔵) 두 사람을 후계로 삼았다. 당주인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는 조선에 출병했을 때에 후카미 요리쿠라를 군사(참모), 인도 요리모리를 그 보좌역으로 삼았으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출병으로 당주가 부재한 때를 노리고 후카미 일족은 소동을 일으키거나, 카토 키요마사에 의지해 사사키로 도주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벌였으나 전부 실패했다. 요리쿠라는 키요마사를 따라 울산성 전투에 나섰으나 사.. 2024. 12. 27.
쿠마모토현의 역사 25 - 아마쿠사의 상황 옛 코니시(小西)령 중 아마쿠사는 쿠마모토번에 포함되지 않았고,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의 히젠 카라츠(肥前唐津)번의 월경지가 되었다. 아마쿠사는 한때 쿠마모토 번령이었지만, 열성적인 법화경(法華経, 妙法蓮華経, 묘법연화경)의 신자였던 카토 키요마사는 키리시탄이 뿌리내린 이곳을 싫어했기에 아마쿠사와 붕고(豊後)의 츠루사키(鶴崎)와의 교환을 신청해 케이쵸 8년(1603년)에 이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케이쵸 6년에 쿠마모토 번령 중에 아마쿠사가 없고 츠루사키가 있었으며, 히젠 카라츠번이 아마쿠사를 지배하고 있던 증거가 발견되어 위 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발포된 신부(バテレン) 추방령 이후에도 코니시 유키나가 휘하였던 아마쿠사.. 2024. 12.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24 -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막번체제의 성립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케이초 5년(1600년) 9월, 양분된 천하를 결정짓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큐슈의 다이묘도 동서로 나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측(동군)에는 카토 키요마사 외에 쿠로다(나카츠), 나베시마(히젠), 호소카와(코쿠라[1])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측(서군)에는 코니시 유키나가 외에 시마즈, 오토모, 타치바나(야나가와)가 붙었다. 사가라씨는 당초 서군에 속했으나, 기후성의 전투 이후 동군으로 갈아탔다. 히고에서는 아리마, 오무라씨의 지원을 받은 키요마사가 시마즈씨 등의 조력을 얻은 우토 하야토(코니시 유키카게)가 지키는 우토성을 공격했다. 공방전은 장기화되어 10월까지 이어졌으나, 이시다 측의 패배와 코니시 유키나가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하야토는 성문을 열고 자결했다.. 2024. 12. 2.
쿠마모토현의 역사 23 - 히고의 반란군 사후처리 히고의 잔당 사후처리  삿사 나리마사가 할복한 다음날, 히데요시는 히고를 양분해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주었다.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성에 근거하며 히고 북부 19만 5천 석의 영지를 받고, 영내에 모리모토 카즈히사(森本一久) 등을 배치했다. 또한, 요리키(与力)로서 활동했던 국인, 삿사의 구신, 영내와 타국의 낭인 등을 불러들였다. 한편, 유키나가는 우토성을 거점으로 하고, 히고 남부와 아마쿠사 14만 5천석을 영유하면서 자신의 직신을 요지에 배치했다. 히토요시의 사가라씨는 히데요시 진공 시에 시마즈씨를 편들었으나, 가신 후카미 소호(深水宗方)의 끈질긴 교섭으로 화를 면했다. 비록, 야츠시로(八代)와 아시키타(葦北)를 잃기는 했으나 히토요시의 본령은 안도되었다. 하지만 사.. 2024. 11. 30.
징용공 위령비 건립에 나선 재일한국인 우판근 씨 이야기 징용공 위령비 건립에 나선 재일한국인 우판근 씨 이야기 후쿠오카와 쿠마모토 두 현에 걸쳐 있는 미츠이미이케 탄광(三井三池炭鉱) 등에서 일한 징용공 출신 자이니치 코리안와 많은 교류를 나누어 온 우판근 씨(禹判根). 2022년 여름, 그는 징용공이 수용되었던 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福岡県大牟田市)의 탄광주택 터에 한국어 비석을 세웠다. 한국 정부는 징용공 문제 해결안을 결정했지만 우 씨는 "정치적으로는 끝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우려를 표했다.  4살 때 한국 거제도에서 일본에 온 우씨는 현재 시민단체 '자이니치 코리안 오무타'(在日コリアン大牟田) 대표를 맡고 있다. 1990년 무렵, 탄광에서 친구를 잃은 전 징용공이 "올 때는 함께였던 네가 왜 죽느냐"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가슴이 아.. 2024. 11. 28.
쿠마모토의 아들, 코노에 타다테루 전 일본적십자사 사장 올해 5월, 일본 적십자사 사장이자 국제적십자사·적신월사연맹(IFRC) 총재를 지낸 코노에 타다테루 씨(近衞忠煇)의 가 출간되었다(중앙공론신사, 인터뷰 및 구성 오키무라 타케시(沖村豪)). ​5월 8일은 국제적십자위원회 창시자인 앙리 뒤낭(Henry Dunant)의 생일이자 '세계 적십자의 날'이다. 일본 적십자사의 전신은 메이지 10년인 1877년 5월 1일,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때 설립된 터라, 일본의 적십자 운동에서 5월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코노에 씨의 저작이 이 시기에 출간된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저자인 코노에 씨는 그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다섯 섭관 가문(五摂家; 고셋케, 가마쿠라 시대(1185~1333) 이후, 후지와라 집안 중 섭정・관백으로 임명된 다섯 개의 가문.. 2024. 11. 26.
쿠마모토현의 역사 22 -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과 쿠마모토 근세의 시작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통일 일본사에서 일반적으로 근세는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上洛)을 기점으로 한다. 하지만 히고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을 시작으로 보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3월,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들어온 히데요시는 이후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4월 11일에는 히고 난칸(肥後南関), 16일에는 쿠마모토성, 19일에는 야쯔시로성, 26일에는 미나마타성에 이르렀다. 5월 8일에는 이즈미(出水)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이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니로 타다모토(新納忠元)를 항복시키고 발길을 돌려 6월 2일에는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히고의 국인 52명에게 본령안도(本領安堵[1])의 서장을 보내는 동시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2024. 11. 2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