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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18 - 히고의 전국시대, 키쿠치씨의 멸망

by kumamon.kr 202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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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씨의 발상지인 키쿠노이케(菊之池) 유적

히고의 전국시대 - 키쿠치씨 종가의 단절


일본의 전국시대는 메이오의 정변(1493년) 혹은 오닌의 난(1467년)을 기점으로 하지만, 히고국의 전국시대는 키쿠치 요시카즈가 사망한 에이쇼(永正) 원년(1504년)을 시작으로 본다.

 

아소씨의 전성기

아소씨의 내부 분쟁인 마카도바루의 전투(馬門原の戦い, 혹은 幕の平合戦. 장소는 현재의 야마토정 스기키 부근)에 키쿠치 시게토모가 개입했으나 패배한 이후, 키쿠치씨의 지배영역은 줄어들었고, 지도력도 현저히 저하됐다. 가독을 이은 시게토모의 아들 요시카즈는 직신의 저항에 부딪혀, 분키(文亀) 원년(1501년)에 시마바라(島原)로 망명했다. 그러자 일족은 합의 끝에 우토 타메미쯔(宇土為光)를 슈고로 삼았다.

2년 후, 요시카즈는 아소씨, 사가라씨 등과 제휴하고, 아마쿠사씨 등의 지원을 받아 와이후(隈府)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 돼 이듬해 사망했다. 요시카즈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상속 분쟁이 발발했다. 이후, 아소씨는 야베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그 융성함이 극에 달했다.

 

키쿠치씨의 쇠퇴

 

요시카즈의 유언에 따라 키쿠치 시게야스(菊池重安)의 아들 마사타카(政隆)가 당주가 됐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일족은 키쿠치씨 대신에, 세력을 키워온 아소 가문의 대궁사 아소 코레나가(阿蘇惟長, 키쿠치 타케쯔네(菊池武経))를 후계 슈고직에 추대했다.

에이쇼(永正) 3년(1506년), 코레나가의 배후에서 히고 장악을 획책하던 오토모씨가 병력을 끌고 직접 개입했다. 키쿠치성에 입성한 아소 코레나가는 대궁사직을 동생인 코레토요(惟豊)에게 물려주고 키쿠치 타케쯔네로 이름을 고쳐 당주의 자리에 올랐다. 마사타카는 도망친 뒤 타마나, 시마바라에서 저항을 이어갔으나, 3년 후에 포박돼 쿠메(久米)의 안코쿠사(安国寺, 키쿠치군 시스이정(泗水町))에서 자결했다.

하지만, 키쿠치 타케쯔네는 교만해져서 가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불과 3년만에 지위를 잃게 된다. 이 배경에는 흑막인 오토모 치카하루(大友親治)의 의향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 오토모씨가 키쿠치 가문을 탈취해 히고를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타케쯔네를 쓰고 버릴 생각이었다는 설이 있다. 키쿠치 가문의 총령에는 타쿠마씨 출신인 키쿠치 타케카네(菊池武包)가 옹립되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키쿠치 가문의 늘어선 매 깃털(並び鷹の羽) 문장

키쿠치씨의 멸망


키쿠치씨의 종가가 단절되던 당시 계략을 꾸민 오토모 치카하루・요시아키(義鑑) 등의 목적은 키쿠치 가문 탈취와 히고 지배에 있었다. 에이쇼 17년(1520년) 요시아키의 동생 오토모 요시타케(大友義武)가 키쿠치 성을 자처하고 그 가독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와이후에 들어가지 않고 쿠마모토 성(隈本城)을 본거지로 삼았다. 요시타케를 보필한 것은 카노코기 치카가즈(鹿子木親員), 혼죠 나가카타(本郷長賢), 타시마 시게카타(田島重賢) 등 아키타・타쿠마군의 무사였다. 특히 카노코기 치카가즈는 국내의 분쟁조정에서 활약했고, 또한 후지사키궁 재건을 주청하고 연가사(連歌師)와 교류하는 등 문인 무장으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하지만 오토모씨가 목적한 히고지배의 일환이었던 키쿠치 요시타케는 이윽고 독자적인 색채를 강화해 나갔다. 텐분(天文) 2년(1533년) 큐슈 북부를 노린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제시한 치쿠고 슈고직에 이끌려 출병한 일에서 요시타케의 생각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는 오토모 본가의 당주이자 요시타케의 형인 요시아키의 격노를 샀다. 요시아키는 히고에 쳐들어갔고, 요시타케는 시마바라를 거쳐 사가라 하루히로(相良晴広)의 밑으로 도망쳤다. 요시아키는 오우치씨와의 화친에 응한 뒤, 텐분 12년(1543년)에 히고 슈고직에 올라 히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하지만 텐분 19년(1550년) 2월에 요시아키가 2층 붕괴의 변(二階崩れの変)으로 살해되자, 요시타케는 세력을 되찾고, 과거의 중신들과 나와씨・사가라씨등의 협조를 얻어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아소씨와 죠씨(城氏)를 끌어들인 요시아키의 적자 요시시게(義鎮)의 공격을 받았다. 요시타케는 여기에 맞서기 어려워 시마바라로 도망쳤고, 다시 사가라씨에게 의지하게 된다.

사가라 하루히로는 사쯔마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에게 화친 알선을 의뢰하는 등, 오토모 요시시게에게 키쿠치 요시타케와의 화해를 계속 청했으나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요시타케는 텐분 23년(1554년), 요시시게의 거듭된 귀환명령에 마음의 각오를 하고 붕고(豊後)로 귀환한다. 그러나 도중에 오토모 세력에게 둘러싸여 어쩔 수 없이 자결하고 만다. 이로써 히고 무사의 유력 집안인 키쿠치씨는 멸망했다. 오토모씨는 히고 북부를 장악했고, 정치 실무는 과거 키쿠치 가신단에게 맡기는 정책을 취했다.

 


사진출처

* 분분 블로그(일본어)
* 위키미디어 - 키쿠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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