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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16 - 무로마치 시대의 키쿠치씨와 아소

by kumamon.kr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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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키 하치만궁

室町の肥後 무로마치 시대의 히고
菊池氏の盛衰 키쿠치씨의 성쇠


今川貞世が去り渋川満頼が九州探題に就くと、菊池氏はまたも反逆の姿勢を顕わにした。しかし、続く断続的な戦乱の中菊池氏は段々と衰え、代わって詫磨満親が勢力を伸ばした。しかしこれも一時期なもので、南北朝時代に名を馳せた河尻氏とともに応永年間には目立った活躍を見せなくなった。

이마가와 사다요가 떠나고 시부카와 미츠요리(渋川満頼)가 큐슈 탄다이에 취임하자, 키쿠치 씨는 다시 반역의 자세를 드러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간헐적인 전란 속에 키쿠치 씨는 점점 쇠퇴하고, 대신 타쿠마 미츠치카(詫磨満親)가 세력을 넓혔다. 하지만 이 역시 한때의 일로, 타쿠마 씨와 남북조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카와시리 씨는 오에이 연간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菊池氏は一時的に勢いを取り戻す。菊池兼朝は肥後守護職に任ぜられたものの、阿蘇氏や相良氏の勢力圏にまでは守護の権力を及ぼすことはできず、一国を支配するだけの権力を打ち立てられず、菊池氏の歴代守護を悩ませることになった。永享3年(1431年)菊池持朝の代になると親幕府の態度を表し、筑後・肥後の守護に任じられた。菊池城下は隈本に代わり守護所(隈府)となった。次代の為邦は日朝貿易に乗り出し、また城下に玉祥寺や碧巌寺を建立するなど、その富と徳は褒め称えられた。しかし後半生には筑後守護職を大友氏に奪われて日朝貿易が不可能となり、相良氏の八代進出にも無策のままで終わった。これが菊池氏衰退の始まりとされる。

키쿠치씨는 일시적으로 세력을 되찾았다. 키쿠치 카네토모(菊池兼朝)는 히고 슈고직을 맡게 됐으나, 아소씨와 사가라씨의 세력권까지 슈고 권력이 미치지는 못했다. 일국 전체를 지배할만한 권력을 세우지 못한 상황은 키쿠치씨의 역대 슈고들을 괴롭혔다.

에이쿄(永享) 3년(1431년) 키쿠치 모치토모(菊池持朝)의 대에 이르러 키쿠치씨는 친막부적인 태도를 보였고, 치쿠고와 히고의 슈고를 맡게 됐다. 키쿠치성은 쿠마모토(隈本)를 대신해 슈고 소재지(守護所)인 와이후(隈府)가 됐다.

 

다음 대인 타메쿠니(為邦)는 조선과의 무역에 나섰으며, 성내에 교쿠쇼사(玉祥寺)와 헤키간사(碧巌寺)를 선립하는 등 그의 부와 덕은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생애 후반에는 치쿠고 슈고직을 오토모씨에게 빼앗겨 조일무역이 불가능해졌고, 사라가씨의 야츠시로 진출에도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이것이 키쿠치씨 쇠퇴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次代菊池重朝は守護職も継承し、公権力を用いた菊池城下の整備を行い、菊池五山や城下町の形成がこの頃行われた。重朝はまた、文化人としての業績も残した。重臣の隈部忠直とともに建立し、招かれた桂庵玄樹が詠んだ漢詩に残される孔子堂。藤崎八旛宮の造営。また連歌の会も多く催した。文明13年(1481年)8月に興行した万句連歌は、後に書写されたものが伝わり、会の参加者を知ることが出来る。それによるとほとんどが肥後北部の者で、菊池氏系の有力庶氏は加わっていない。また、半数は菊池氏の直臣の名が見られ、特に隈部氏からは多くの出席が見られる。この頃、菊池氏勢力下の政務は隈部氏・赤星氏・城氏(藤原姓)が家老家として執り行い、かつて「菊池家憲」で定められた合議制は影も形も無かった。重朝が亡くなった明応2年(1493年)、菊池惣領は嫡子能運が継いだが、彼が最後の菊池本家嫡流となった。

 다음 대인 키쿠치 시게토모(菊池重朝)는 슈고직도 계승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쿠마모토 성내의 정비를 실시했다. 키쿠치 5산과 성하마을(城下町)의 형성이 이 무렵 이뤄졌다. 또한, 시게토모는 문화인으로서의 업적도 남겼다. 중신인 쿠마베 타다나오(隈部忠直)와 함께 건립한 공자당에는 초청을 받아 찾아온 케이안 겐쥬(桂庵玄樹)가 노래한 한시가 남아 있다. 또한, 후지사키 하치만궁도 이 시기 축조됐으며, 연가(連歌) 모임도 여러 번 열렸다.

분메이(文明) 13년(1481년) 8월에 흥행한 만구연가(万句連歌)는 나중에 필사된 것이 전해진 덕분에 모임 참가자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참가자의 대부분은 히고 북부 사람들이었고, 키쿠치씨 계열의 유력한 분가(庶氏)는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참가자의 절반은 키쿠치씨의 직신으로 보이며, 특히 쿠마베씨가 많이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키쿠치씨 세력의 정무는 쿠마베씨, 아카호시씨(赤星氏), 죠씨(城氏, 후지와라성)가 가로 가문으로써 집행했으며, 예전에 ‘키쿠치 가헌’에서 정한 합의제는 그림자도 실체도 없어졌다. 시게토모가 죽은 메이오 2년(1493년), 키쿠치의 총령은 적자인 요시카즈(能運)가 이었지만, 그는 최후의 키쿠치 본가 적류가 됐다.

 

阿蘇氏の分裂、矢部郷に拠点を移す。「浜の館」の隆盛
아소씨의 분열, 야베향으로 거점을 옮기다. ‘하마의 야가타’의 융성


一方、阿蘇氏は一族分断の危機に晒されていた。阿蘇惟澄は一時北朝にも付いた嫡男・惟村に大宮司を継がせたが、弟の惟武はこれを不服として征西府に訴え出て認められ、貞治6年/正平22年(1367年)大宮司の補任を受けた。この時から阿蘇一族はふたつの系列に分かれて対立を始めた。

한편, 아소씨는 일족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소 코레즈미는 한때 북조에 붙은 적남 아소 코레무라(阿蘇惟村)에게 대궁사직을 물려줬다. 하지만 코레무라의 동생 코레타케(惟武)가 에이 불복해 정서부에 소를 올렸고, 이를 인정받아 코레타케가 죠지 6년/쇼헤이 22년(1367년) 대궁사의 보임을 받았다. 이 때부터 아소 일족은 두 계열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다.

阿蘇惟村 – 惟郷 – 惟忠は矢部に本拠を置き九州探題や大友氏の支持を得ていたが、阿蘇神社領を配下に置き菊池氏に支援された惟武 – 惟政 – 惟兼を抑えられなかった。応永11年(1404年)には惟郷が攻め入り、同族での合戦となった。この時には幕府が仲裁に入った。その後も争いは続いたが、宝徳3年(1451年)一族長老らの決議により惟兼の子・惟歳を惟忠の養子として両統の一本化を図った。しかし、惟忠は実権を手放さなかったため、文明17年(1485年)惟歳とその子・大宮司惟家は相良氏の助力を受け、一方の惟忠と子・惟憲は守護菊池重朝の支援を取り付けて幕の平(現:上益城郡山都町杉木・山田)で激突した。戦いは惟忠と惟憲側の勝利(幕の平合戦)に終わった。

아소 코레무라, 코레사토(惟郷), 코레타다(惟忠)는 야베(矢部)에 본거지를 두고 큐슈 탄다이와 오토모씨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아소신사령을 지배하에 두고 키쿠치씨의 지원을 받은 코레타케, 코레마사(惟政), 코레카네(惟兼)을 억제할 순 없었다.

오에이 11년(1404년)에는 코레사토가 쳐들어와 동족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는 막부가 중재에 들어갔다. 그 후에도 싸움은 계속됐으나, 호토쿠(宝徳) 3년(1451년) 일족 장로들의 결의로 코레카네의 아들 코레토시(惟歳)를 코레타다의 양자로 삼아 양통의 단일화를 꾀했다.

하지만 코레타다가 실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싸움이 벌어졌다. 분메이 17년(1485년) 코레토시와 그 아들 대궁사 코레이에(惟家)는 사가라씨의 조력을 받았고, 코레타다와 그 아들 코레노리(惟憲)는 슈고 키쿠치 시게토모의 지원을 얻었다. 이들은 마카도바루(幕の平, 현 카미마시키군 야마토정 스기키・야마다)에서 격돌했다. 싸움은 코레타다와 코레노리측의 승리(마카도바루의 전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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