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번체제의 성립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케이초 5년(1600년) 9월, 양분된 천하를 결정짓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큐슈의 다이묘도 동서로 나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측(동군)에는 카토 키요마사 외에 쿠로다(나카츠), 나베시마(히젠), 호소카와(코쿠라[1])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측(서군)에는 코니시 유키나가 외에 시마즈, 오토모, 타치바나(야나가와)가 붙었다. 사가라씨는 당초 서군에 속했으나, 기후성의 전투 이후 동군으로 갈아탔다.
히고에서는 아리마, 오무라씨의 지원을 받은 키요마사가 시마즈씨 등의 조력을 얻은 우토 하야토(코니시 유키카게)가 지키는 우토성을 공격했다. 공방전은 장기화되어 10월까지 이어졌으나, 이시다 측의 패배와 코니시 유키나가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하야토는 성문을 열고 자결했다.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카토 키요마사는 히토요시와 아마쿠사를 제외한 히고 일국을 얻어, 쿠마모토번이 성립됐다. 그 석고는 기존의 19만 5000석에 코니시씨의 옛 땅 14만 5000석과 붕고(豊後)의 일부, 구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더해져 도합 54만 석이 됐다. 단숨에 대 다이묘(大大名)의 반열에 오른 키요마사는 가신단을 확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코니시와 타치바나씨의 옛 가신들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케이쵸 연간에는 수리를 거듭해 가며 사용하던 쿠마모토성(隈本城)을 포함한 챠우스산 일대에 대규모의 근대식 성을 짓는 공사에 착수했다. 토목과 치수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 쿠마모토성(熊本城)이 케이쵸 12년(1607년)에 완공됐다. 이 때,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의 한자를 ‘隈本’에서 ‘熊本’로 고쳤다. 이는 일본어로 한자 ‘隈’(쿠마)를 ‘언덕에서 걱정하다’라고도 읽을 수 있기에, 다이묘의 거성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한 데 따른 것이라 한다. 이 축성의 모습을 노래한 광가(狂歌[2]) <쿠마모토에 / 돌 굴리는 챠우스 산 / 적에게는 카토[3]의 성주인가>가 유행하여 키요마사가 기뻐했다고도 한다.
키요마사는 치수사업과 그 자신의 카리스마로 인해 영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남만 무역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케이쵸 16년(1611년), 쿄토의 니죠성(二条城)에서 열린 토쿠가와 이에야스,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회견에 참석했다가, 히고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사망했다. 당시 적남인 타다히로는 10세였다.
에도 막부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를 감국(監国[4]) 자격으로 히고에 파견하고, 5가로를 정해 그들의 합의제로 번정을 운영했다. 이듬해에는 타다히로의 상속이 인정됐으나 이 때도 막부는 미나마타, 우토, 야베(矢部)의 세 성을 파괴할 것을 지시하고, 5가로의 인사이동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필두 가로였던 카토 미마사카(加藤美作)가 격하되고, 카토 우마노스케(加藤右馬允)가 필두 겸 야츠시로 성주대리(城代)에 취임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겐나(元和) 4년(1618년), 우마노스케 파(우마카타)는 미마사카 일파(우시카타)가 모반할 염려가 있다고 호소했고, 미마사카는 즉각 이에 대한 반론을 상주했다. 이는 쇼군인 토쿠가와 히데타다의 재량 사항이 됐다.
오사카 여름의 진 때 우시카타가 토요토미 측에 내통하고, 토쿠가와 측에 대한 온갖 헛소문을 유포시켰다는 혐의로 우시카타가 단죄되어 미마사카 일파는 모두 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키요마사가 가신단의 수를 급격히 늘린 점이 있다는 말도 있다. 키요마사 사후 원래 여러 방면에서 모인 집단의 결속력에 균열이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시카타와 우마카타의 소동’(牛方馬方騒動)이라 불린다.
카토 타다히로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소동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타다히로는 훗날 쇼군 가문의 상속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칸에이 9년(1632년) 토쿠가와 히데타다가 사망하자, 타다나가를 받들고 이에미츠를 암살하겠다는 계획[5]이 담긴 괴문서가 에도의 각 다이묘 가문에 전달됐다. 에도에 있었던 타다히로의 적자 미츠히로[6]는 이를 막부에 전하지 않았고, 전부터 타다나가와 친분이 있던 카토씨도 처벌의 대상이 됐다. 히고국은 몰수되어 타다히로는 개역, 미츠히로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히고에는 호소카와씨(細川氏)가 전봉되었다.
사진출처
* 쿠마모토성 - 위키미디어
* 서생포왜성 - 국가유산청
주석
[1] 호소카와 씨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적으로 부젠국 코쿠라번(小倉藩)을 받았다. 코쿠라번의 중심지는 현재 후쿠오카 현 키타큐슈 시 코쿠라키타구(小倉北区)이다.
[2] 狂歌(광가; 교카) : 단가(短歌)의 한 양식으로 풍자와 익살이 주 소재였다.
[3] かとう는 加藤의 히라가나 표기면서, 下等(하등), 火灯(등잔) 등의 히라가나 표기이기도 하다.
[4] 監国(감국; 칸코쿠) : 중국에서 황제가 집무를 볼 수 없는 상황인 경우 황태자 등 황족이 황제를 대신해 집무를 볼 때 ‘감국’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섭정’이란 의미로 쓰인 것.
[5] 이에미츠는 2대 쇼군 히데타다의 적남이고, 타다나가는 이에미츠의 친동생이다. 이에미츠는 이미 1623년에 쇼군직에 오른 상태였다. 히데타다 사망 이후 타다나가는 쇼군의 친동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개역을 당하고, 이듬해에 할복한다.
[6] 161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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