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요시번의 성립
히데요시가 큐슈를 통일할 때에 사가라 가문의 존속에 분주했던 후카미 소호(深水宗方)는 자신의 후계 봉행(奉行)으로 인도 요리야스(犬童頼安)의 적자인 인도 요리모리(犬童頼兄)를 지명했다. 하지만 일족의 반대에 부딪힌 요리야스는 요리모리와 함께 자신의 조카인 후카미 요리쿠라(深水頼蔵) 두 사람을 후계로 삼았다.
당주인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는 조선에 출병했을 때에 후카미 요리쿠라를 군사(참모), 인도 요리모리를 그 보좌역으로 삼았으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출병으로 당주가 부재한 때를 노리고 후카미 일족은 소동을 일으키거나, 카토 키요마사에 의지해 사사키로 도주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벌였으나 전부 실패했다. 요리쿠라는 키요마사를 따라 울산성 전투에 나섰으나 사망했고, 요리모리는 사가라 가문 내에서의 지위를 높여갔다.
위상을 확고히 한 요리모리는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토쿠가와 측(동군)과 밀통하는 과정에서 활약해 사가라 가문의 안위에 기여했다. 하지만 요리모리의 전횡도 점점 심해졌다. 사가라 요리후사는 요리모리를 단죄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요리후사의 뒤를 이은 사가라 요리히로(相良頼寛)는 막부에 요리모리의 단죄를 신청했다.
칸에이 17년(1640년), 요리모리 등은 에도에 불려가 이나바 마사토시(稲葉正利)에게 맡겨졌다. 히토요시에 남은 일족은 저택에 틀어박혀 저항했으나 이것도 진압됐다. 요리모리는 최종적으로 츠가루(津軽[1])에 유배되어 거기서 죽었다.
히토요시 번 사가라 가는, 에도 시대의 여러 번 중에서 시마즈씨와 더불어 가장 옛날부터 지속된 가문이 됐다. 그 석고는 2만 2000석이라고 한다. 근세 히토요시 성의 건축은 분로쿠(文禄) 년간부터 시작됐으나, 본격적인 건축은 케이초 12년(1607년)부터라고 한다. 히토요시 번에서는 병농분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각 마을에는 향시(郷侍[2])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호소카와의 입국
칸에이 9년(1632년), 히고국에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가 들어왔다. 일행은 선두에 카토 키요마사의 위패를 내걸고 쿠마모토성에 입장한 뒤, 먼저 키요마사공[3]의 묘를 향해 멀리서 절을 했다(요배)고 한다. 은거하던 타다토시의 선대인 타다오키(忠興)은 야츠시로 성으로 들어갔다.
전국시대에는 주군이 죽으면 가신이 이를 좇아 할복하는 풍습이 있었고 이는 에도시대 초기까지 계속됐다. 호소카와 가의 경우 칸에이 18년(1641년) 3월에 번주인 호소카와 타다토시, 쇼보 2년(1645년) 윤5월에는 그 동생인 타츠타카(立孝), 같은 해 12월에는 전 번주 타다오키, 케이안(慶安) 2년(1649년)에는 2대 번주이자 타다토시의 아들인 미츠나오(光尚)가 죽었다. 이 때마다 여러 명의 순사자가 나왔다.
이 때의 일을 바탕으로 모리 오가이[4](森鷗外)는 <아베 일족>(阿部一族), <오키쯔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저술했다. 이 작품은 순사한 아베 야이치에몬(阿部弥一右衛門)의 자손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현재는 이 내용이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한편, 호소카와 미츠나오가 죽었을 때, 그 적자인 호소카와 츠나토시(細川綱利)는 아직 6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계 문제가 생겼다. 막부는 쿠마모토 번에 사츠마(薩摩)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기 때문에, 어린 번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지 변경(国替[5])이나 우토의 호소카와 유키타카(細川行孝, 타츠타카의 아들)와 쿠마모토 번을 양분하는 안도 제시됐다. 하지만 가신들이 호소카와 가문의 과거 공로를 내세우고, 또한 미츠나오의 충절 넘치는 유언이 좋은 쪽으로 작용하면서 호소카와 가문은 분열의 위기를 넘겼다.
츠나토시가 성장한 이후인 칸분(寛文) 6년(1666년), 츠나토시의 동생인 토시시게(利重)를 분가시켜 히고신덴 번(肥後新田藩, 에도의 텟포스(鉄砲洲)의 저택에 상주했다.[6] 후에 히고의 타카세(高瀬)로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에 타카세 번이라고도 함.)을 창설해, 지번(支藩[7])으로서의 역할을 맡겼다.
사진 출처
* 히토요시 성의 석벽 - 위키미디어
주석
[1] 津軽(츠가루) : 현재의 아오모리현(青森県)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
[2] 郷侍(향시; 고자무라이) : 무사의 신분을 지닌 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같은 말로 郷士(향사, 고시)
[3] 清正公(청정공; 세이쇼코) : 쿠마모토에서는 ‘清正公’이라고 할 때는 ‘키요마사’가 아니라 清正의 음독인 せいしょう(세이쇼)라고 한다. 이 글은 한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키요마사 공’으로 옮겼다.
[4] 1862~1922. 메이지, 타이쇼 시대의 저술가.
[5] 国替(국체; 쿠니가에) : 에도 시대에 제후의 영지를 다른 곳으로 바꾸는 일. 같은 말로는 転封(전봉; 텐포), 移封(이봉; 이호)
[6] 참근교대를 하지 않고 에도에 상주하는 정부(定府) 다이묘
[7] 支藩(지번; 시한) : 하나의 번에서 갈라져 나온 번으로, 히고신덴 번은 쿠마모토 번으로부터 3만5000석을 나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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