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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13 - 남조에 충의를 지킨 히고 무사단

by kumamon.kr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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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분투하는 닛타 요시사다(1900년 쯔치야 코이츠(土屋光逸) 그림)

南朝一남조 일변도

 

天皇親政下の政策は、拙速な改革や朝令暮改、恩賞の不公平や新課など多くの問題をはらんだもので、親政は急速にその支持を失っていった。建武2年(1335年)足利尊氏は鎌倉で反親政にり出し、後醍醐天皇は新田義貞を討伐に差し向けた。天皇に近侍していた菊池武重武吉兄弟は「菊池千本槍」を携え、また阿蘇惟時惟直親子も共に新田軍に加わって、箱根竹ノ下のいに参戦した。この時、阿蘇親子に向けた「後醍醐天皇綸旨」が「阿蘇家文書」として現存している。しかし新田方は破れ、京都までの退却をも追われた。菊池武重は殿軍として足利直義を退ける活躍を見せ、建武3/延元元年(1336年)には京都大渡橋のいでも尊氏軍を迎した。その後武重は比叡山に逃れた後醍醐天皇に付きい、そのまま軟禁された。

 

천황 친정하의 정책은 졸속 개혁과 조령모개, 은상의 불공평과 새로운 과세 등 여러 문제를 품고 있었기에 그 결과 친정 권력은 급속히 그 지지를 잃어갔다. 켄무 2(1335)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카마쿠라에서 반친정(反親政)의 기치를 군대를 일으켰고, 고다이고 천황은 닛타 요시타다를 토벌군으로 보냈다.

천황의 근시(近侍)로 있던 키쿠치 타케시게타케요시 형제는키쿠치 천본창’(菊池千本槍[1])을 손에 들고, 아소 코레토키(阿蘇惟時)코레나오(惟直) 부자와 함께 닛타군에 가담해 하코네타케노시타(箱根)의 싸움에 참전했다. 이 때, 아소 부자에게 내려진고다이고 천황 윤지(綸旨[2])’아소가문 문서로 현존하고 있다.

하지만 닛타 쪽은 패하여 쿄토까지 퇴각했다. 키쿠치 타케시게는 후군(殿軍[3])으로써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直義)를 물리치는 활약을 보였으며, 켄무 3/엔겐(延元) 원년(1336)에는 쿄토 오와타리바시(京都大渡橋)의 싸움에서도 타카우지군을 요격했다. 그 후 타케시게는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도망친 고다이고 천황을 따라갔다가 그대로 연금됐다.

 

足利尊氏は京都で北畠家に敗北し、態勢建て直しのために九州へ逃れた。この際、九州の有力武士に軍勢催促を送り、武家政復活に期待を寄せる少弐頼尚らはこれにった。しかし、菊池阿蘇氏は南朝への義理に服した。武重不在を守る菊池武敏や阿蘇大宮司惟直と惟成兄弟は軍を率いて北上し、優勢な力を背景に多良浜のいに臨んだがこれに敗れ、尊氏の再決起をみすみす許した。建武343日、九州北部に一色範氏(道猷)を、南部に畠山直を置き、少弐頼尚や大友氏泰らを率いて尊氏は大船で京へ出した。その途上、迎えつ天皇方を湊川のいで破し、敗れた楠木正成とともに菊池武吉は切腹して果てた。この後、尊氏と、これを避けて吉野に逃れた後醍醐天皇による、南北の統が迭立する南北朝時代が始まった。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쿄토에서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에게 패배하고, 태세를 재정비하기 위해 큐슈로 도망쳤다. 이때 그는 큐슈의 유력 무사단에게 군대를 독촉하는 서장을 보냈고, 무가정권 부활에 기대를 건 쇼니 요리히사(弐頼尚) 등이 이에 따랐다. 하지만, 키쿠치씨와 아소씨는 남조(천황측)와의 의리를 지켰다.

타케시게가 부재하던 시기를 지키고 있던 키쿠치 타케토시, 아소 대궁사 코레나오와 코레나리 형제는 군을 끌고 북상하여, 우세한 전력을 배경으로 타타라하마(良浜)의 전투에 임했지만 패했다. 그들은 타카우지의 재기를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켄무 3 4 3,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큐슈 북부에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 법명 도유(道猷)), 남부에 하타케야마 타다아키(畠山直)를 배치했다. 그리고 쇼니 요리히사(弐頼尚)와 오토모 우지야스(大友氏泰) 등과 함께 대선단을 끌고 수도로 출발했다.

타카우지는 도중에 천황 측의 요격을 당했으나, 미나토가와 강의 전투(湊川)에서 이를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한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키쿠치 타케요시(菊池武吉)는 할복해 죽었다. 이후 타카우지와, 이를 피하여 요시노로 도망친 고다이고 천황이라는 남북의 두 계통이 양립(양통질립[4])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됐다.

키쿠치 양식 창의 창끝

足利尊氏ら本勢力が九州を離れると、肥後武士は抵抗をめた。尊氏出直後の413日の安寺(現:玉名市)や16日の鳥栖原(現:西合志町)でい、今川助時が尊氏方として肥後国国府に入ると唐川(現:菊陽町)で合を挑んだ。幽閉態をし菊池武重が肥後にると、建武4年(1337年)に兵。阿蘇惟時の娘婿阿蘇惟澄や八代で地頭職に就いていた名和氏とも協調し、犬塚原(現:御船町)で一色行を破るなどの行動を見せた。

 

아시카가 타카우지 등 본세력이 큐슈를 떠나자 히고 무사단은 저항을 강화했다. 타카우지가 떠난 직후인 4 13일에 안라쿠 사(, 현 타마나 시)에서, 16일에 토스바루(鳥栖原, 니시코시 정)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타카우지 측의 이마가와 스케토키(今川助時)는 히고 국의 국부에 입성하면서, 카라카와 강(唐川, 현 키쿠요정)에서 전투를 벌였다.

유폐 상태를 벗어난 키쿠치 타케시게는 히고에 돌아온 뒤인 켄무 4(1337)에 거병했다. 그는 아소 코레토키(阿蘇惟時)의 사위인 아소 코레즈미, 야츠시로에서 지두직을 맡고 있었던 나와씨(名和氏)와도 협력하여, 이누즈카하라(犬塚原, 현 미후네정)에서 잇시키 요리유키(一色)를 격파하기도 했다.

 

その行動において「南朝一倒」とも評される肥後武士ではあったが、態は必ずしも一枚岩ではなかった。この時期は、所領を嫡男に一括相させる慣習がまり、一見遺産の分散を防ぐこの方法は反面一族いをめてしまった。阿蘇氏は一族が南北朝に割れたが、惟直の死後大宮司に復していた阿蘇惟時は中立の態度を貫くことで一族の分裂を防いだ。

 

히고 무사는 그 행동에 대해 남조 일변도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상을 보면 반드시 한 덩어리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는 영지를 적남에게 일괄 상속시키는 관습이 널리 퍼졌다. 이 관습은 얼핏 보면 유산의 분산을 막는 조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일족 내의 갈등을 심화시키기는 역할도 했다. 아소씨는 일족이 남북조로 갈라졌지만, 코레나오 사후에 대궁사에 복귀한 아소 코레토키가 중립의 태도를 유지해 일족의 분열을 막았다.

 

菊池氏も同じ問題を抱えていたが、菊池武重は氏族を纏める理念を外部に求め、曹洞宗の僧大智を聖護寺に招いて「菊池家憲」を創った。延元3年(1338年)725日の日付が記されたこの家訓には血判が押され、日本最初の血判起請文とされる。これによると、重要な政治的決領が下すが、政道は寄合衆(談衆)とよばれる一族の集が決定するとある。しかし、翌年武重は亡くなり、後をいだ弟の菊池武士は任に耐えられず程無く引退。さらには本を北朝方の合志幸隆に占領されてしまった。これは阿蘇惟澄の協力を得た庶子の菊池武光が奪還したが、菊池氏の勢力は衰退を見せていた。

 

키쿠치씨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키쿠치 타케시게는 씨족을 아우르는 이념을 외부에서 찾았고 조동종(曹洞宗[5])의 승려 다이치(大智)를 쇼코사(聖護寺)에 불러키쿠치 가헌을 만들었다. 엔겐(延元) 3(1338) 7 25일의 날짜가 적혀진 이 가훈에는 혈판(血判[6])이 찍혀 있어, 일본 최초의 혈판 기청문(起請文, 서약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중요한 정치적 결단은 총령(, 가문의 상속예정자이자 일족의 지휘자)이 내리지만, 일반적인 정사는 요리아이슈(寄合衆[7])이라 불리는 일족 내의 집단이 결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타케시게가 죽고, 그 뒤를 동생 키쿠치 타케히토(菊池武士)가 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소임을 견디지 못하고 곧 은퇴했다. 게다가 본거지를 북조 측인 코시 유키타카(合志幸隆)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나중에 본거지는 아소 코레즈미의 협력을 얻은 서자[8] 키쿠치 타케미쯔(菊池武光)가 탈환하긴 했지만, 키쿠치 씨의 세력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사진출처

 

* 닛타 요시사다 
* 키쿠치 양식의 창 


[1] 菊池千本槍(키쿠치 천본창, 키쿠치 센본야리) : 히고의 호족 키쿠치씨의 용맹함 무사 정신을 나타내는 표현. 또한 키쿠치씨가 고안해낸 창의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키쿠치 (菊池槍)이라고도 한다.

[2] 綸旨(윤지; 린지) :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3] 殿軍(전군; 덴군) : 대부대의 최후미에서 적의 습격을 대비하는 부대. ‘殿 신가리(しんがり)라고도 한다.

[4] 迭立(양통질립; 료토테쯔리쯔) : 일국의 세습군주의 가계가 2개로 분열해, 가계에서 번갈아 군주를 즉위시킨 상태를 말함.

[5] 曹洞宗(조동종; 소토슈) : 중국 당나라 만들어진 선종5(임제종,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하나이자, 일본 불교의 5 선종 종파(조동종, 일본달마종, 임제종, 황벽종, 보화종)이다. 현대 일본 불교의 최대 종파다.

[6] 血判(혈판; 켓판) : 손가락을 잘라 피로 찍은 손도장

[7] 寄合衆(기합중, 요리아이슈) : 일본 카마쿠라 중기 이후 막부의 정치회의인 요리아이(寄合) 참여하는 토쿠쇼 10여명을 이르는 . 여기서는 키쿠치 일족의 회의체 참여자들을 뜻한다.

[8] 타케시게가 죽었을 , 타케히토는 17세에 불과했으나 적출이었기에 형의 뒤를 이었다. 타케미쯔는 타케히토보다 2 형이었으나 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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