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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10 - 몽골의 침략(몽고습래)

by kumamon.kr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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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의 일부분으로, 타케자키 스에나가가 전장에서 활약하는 모습이다.

鎌倉政肥後 카마쿠라 정권 하의 히고

 

文治の勅許によって守護地頭が設置されると、平家方にあった肥後では東武士が多く地頭の職を占めた。「張本の輩」とされた菊池氏は、後鳥羽上皇の院宣に始まる承久のに菊池隆能が上皇方に加わったこともあり所領を没収されたが、多くの肥後在武士は地頭の「所堪」(指導統制)に服す小地頭に組みまれた。

 

분지(文治)의 칙허에 따라 슈고(守護)와 지두(地頭)가 설치되고, 헤이케 쪽에 속하던 히고국에서는 동국 무사단이 여러 총지두(地頭)의 직을 차지했다. ‘나쁜 무리’(張本)로 여겨졌던 키쿠치씨의 경우,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인젠(院宣[1])으로 시작한 조큐의 난(承久の)에서 키쿠치 요시타카(菊池能隆)가 상황 쪽에 가담한 것도 있어, 그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러나 많은 히고의 재향무사들은 총지두의소관’(所堪, 지도통제)에 복종하는 소지두에 편입됐다.

 

熊本市北部にあった有名な園「鹿子木」は、訴資料として作成された『鹿子木荘条事書』で主張された開領主の限のさを示す事例で知られていた。しかし、後にこの訴で開領主とされた沙弥寿妙が際には受領であったことが判明し、開領主の限「職留保上分寄進」には疑問が呈されている。また際に、安泰を目指し領地を寄進した地方武士が、引き換えに得た代官職をやがて失なったり、または訴訟で敗れ喪失する例などもあった。

 

쿠마모토 시 북부에 있던 유명한 장원카노코기 장원’(鹿子木)은 개발 영주가 가진 권한의 막강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이는 소장() 자료로 작성된 《카노코기 장원 조목문서》(鹿子木荘条事書)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장에서 개발 영주로 나오는 샤미주묘(沙弥寿)가 실제로는 즈료(受領)였음이 판명되어, 개발 영주의 권한인직권유보, 상분기진[2]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실제로는 편안태평을 목표로 영지를 기증했던 지방 무사가 기증의 대가로 얻은 대관직을 금세 잃거나, 소송에서 패해 직을 상실하는 사례 등도 있었다.

 

1847년 키쿠치 유사이(菊池容斎)가 그린 몽고습래

蒙古、襲몽골의 침략(몽고습래)

 

文永5年(1268年)と8年(1271年)に修好を迫る元の使者を追い返した幕府は、寇を悟し、多くの武士を博多に集結させた。文永11年(1274年)1019日、・壱岐などを由した蒙古軍の船が博多に押し寄せ、いわゆる元寇は始まった。この役には菊池詫間相良氏など肥後の武士も多く馳せじた。集団戦で優位に立ち大宰府に近い水城まで線を進めた蒙古軍だったが、一旦軍船に退却したところ暴風雨が襲い多くが難破してしまい、元軍は敗退した。

 

분에이(文永) 5(1268) 8(1271)에 수교관계를 강요하는 원나라의 사신을 쫓아낸 막부는 침략을 각오하고 많은 무사들을 하카타(博多)에 집결시켰다. 분에이 11(1274) 10 19, 츠시마잇키 등을 경유한 몽골군의 배가 하카타 만에 밀려들면서, 이른바원구’(元寇, 원나라의 침략)가 시작됐다.

이 전쟁에는 키쿠치, 타쿠마(詫間), 사가라 씨 등 히고의 무사들도 다수 출전했다. 몽골군은 회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다자이후와 인근의 미즈성(水城)까지 전선을 진전시켰으나, 일단 자신들의 군선으로 퇴각했다. 그 때 군선에 폭풍우가 휘몰아쳐 많은 배가 난파됐고, 원나라 군은 패퇴했다.

 

しかし再襲必至と睨んだ幕府は、習を破る令をした。それまでは御家人のみを象としていた原則を大し、「本所一円地の住人」すなわち非御家人までにも幕府は出陣を求め、軍功には恩賞で報いると告知した。また、先手を打つ高麗への遠征計を練り、兵力の注進を守護に命じた。このうち、肥後北部の武士名簿を綴った報告書の一部は、後に裏面を用いて『筥崎八幡宮御神記』が作られたため、その容を今日も知ることが出る。ここに見られる武士の中には、井芹西向(いせりさいこう)のように地頭の暴のため領地を失った者もいた。高麗遠征は博多岸の石築地設に注力するため取りやめられたが、召集された兵力は警備に向けられ、肥後武士たちも生の松原に詰めた。

 

하지만 재침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한 막부는 기존의 관습을 깨는 영을 내렸다. 그때까지는 고케닌(御家人)만 대상으로 하던 원칙을 확대하여, ‘장원 일원지의 주민’, 즉 고케닌이 아닌 자에게까지 출진을 요구했다. 막부는 그들에게 군공에는 은상으로 보답하겠다고 고지했다. 또한, 선수를 치기 위해 고려 원정 계획을 짜고, 슈고에게 병력 보고를 명했다.

이 중에서 히고 북부의 무사 명단을 담은 보고서의 일부는, 나중에 뒷면을 이용해서 《하코자키 하치만궁 신보기》(筥崎八幡宮御神)를 만든 덕분에 지금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여기 나오는 무사 중에는 이세리 사이코(井芹西向)처럼 총지두의 횡포 때문에 영지를 잃은 자도 있었다. 고려 원정은 하카타만 연안의 석축지 설치에 집중하기 위해 취소됐지만, 소집된 병력은 경비 임무에 투입됐다. 히고의 무사들도 이키노마츠바라(松原)에 배치됐다.

 

弘安4年(1281年)63日、蒙古軍はふたたび博多襲したが警備の武士と石築地に阻まれ一旦退却。江南の軍と合流し727日に鷹島沖に到着したが、今度は台風にたり難破船が出した。武士軍に掃討をかけ、肥後武士も奮した。

 

코안(弘安) 4(1281) 6 3, 몽골군은 다시 한 번 하카타 만을 침략했지만, 경비하던 무사와 석축지에 막혀 일단 퇴각했다. 그들은 중국 강남의 군대와 합류해 7 27일 타카시마 섬(鷹島)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태풍을 만나 난파선이 속출했다. 무사단은 잔병을 소탕했고, 히고의 무사들도 분투했다.

 

この二度の役(文永の役弘安の役)でった肥後武士の一人竹崎季長は、後に役の模などをえる『蒙古襲来絵詞』を編纂した。菊池氏の庶流とされる竹崎氏は、豊福竹崎(現在の宇城市松橋町竹崎)に在した御家人であった。その中で季長は訴訟に敗れ一族からも孤立していた。そのような時に起こった文永の役は彼にとって千載一遇の好機であり、わずか5騎を引き連れて参戦した。死を恐れず挑み一番けの功をげたが、注進に漏れ恩賞にれなかった。翌年彼は馬具などをって旅費を工面し、中間2人だけを伴って鎌倉まで赴いて、建治2年(1276年)恩賞奉行の安達泰盛に謁見し訴え出た。泰盛は功を認め、季長に東海(現在の宇城市小川町)の地頭職をえた。

 

이 두 번의 전쟁(분에이의 전쟁, 코안의 전쟁)에서 싸운 히고 무사 중 하나인 타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는 나중에 전쟁의 상황 등을 전하는 <몽고습래회사>(蒙古襲来絵[3])를 편찬했다.

키쿠치 씨의 방계로 알려진 타케자키 씨는, 토요후쿠 장원 타케자키(豊福竹崎, 현재의 우토시 마쯔바세정(松橋町) 타케자키)에 살던 쿠니고케닌(御家人, 국 단위로 편성된 고케닌)이었다. 그 중 스에나가는 소송에서 패해 일족으로부터도 고립돼 있었다. 이런 때에 벌어진 분에이의 전쟁은 그에게 천재일우의 호기였고, 그는 불과 5기를 이끌고 참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들어 적진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공(一番)을 세웠다.

하지만 스에나가는 보고에서 누락되는 바람에 은상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마구 등을 팔아 여비를 마련했고, 하인 2명만을 데리고 카마쿠라까지 가서 켄지(建治) 2(1276) 은상봉행인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를 알현해 상소를 올렸다. 야스모리는 공을 인정해, 스에나가에게 토카이향(東海, 지금의 우키시 오가와정)의 지두직을 주었다.

 

弘安の役でも活躍を見せた竹崎季長は、後に東海郷経営に手腕を揮した。これは置文『海東 定置事』の容や、霜月動で滅した恩人安達泰盛を偲び案したともされる『蒙古襲来絵詞』作成に充分な財力を得ていたところからも推測される。

 

코안의 전쟁에서도 활약한 타케자키 스에나가는 나중에는 토카이 향 경영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이는 후대에 전해진 문서(置文)인 《토카이향 신사 정치문서》(海東 定置)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고, 11월 소동(霜月)으로 죽은 자신의 은인 아다치 야스모리를 추모하여 발안했다고 하는 <몽고습래회사>를 지을 만큼 충분한 재력이 있었던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몽고습래회사
* 키쿠치 유사이의 그림


[1] 院宣(원선, 인젠) : 상황 또는 법황이 내린 선지(宣旨)

[2] 留保上分寄進 : 직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본가에 장원을 기증하는 .

[3] (회사, 에코토바) : 글이 곁들여진 그림 두루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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