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朝の時代 남북조 시대
博多合戦は憎しみ深く
하카타 전투로 생긴 깊은 원한
後醍醐天皇の討幕運動に呼応し護良親王が発した北条高時討伐の令旨は、九州の各武士団にも届いた。元弘3/正慶2年(1333年)初頭、当時の菊池氏棟梁・武時は、筑後の少弐貞経・豊後の大友貞宗とともに鎮西探題を攻撃する密約を交わし、その準備にかかった。しかし、この計画は探題の北条英時に漏れ、英時は彼らに博多への出頭を命じた。同年3月12日菊池武時は阿蘇惟直らを従い向かったが、探題から遅参を責められた。計画漏洩を察した武時は決起を働きかけたが少弐・大友両氏はこれを拒絶した。
고다이고 천황의 토막 운동에 호응하여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내린 호죠 타카토키(北条高時) 토벌의 명령서는 큐슈의 각 무사단에게도 전달됐다.
켄코(元弘) 2년・쇼쿄(正慶) 2년(1333년) 초엽, 당시 키쿠치씨의 동량이었던 키쿠치 타케토키(菊池武時)는 치쿠고의 쇼니 사다쯔네(少弐貞経), 붕고의 오토모 사다무네(大友貞宗)와 함께 친제이탄다이(鎮西探題[1])를 공격하기로 밀약하고, 그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계획은 탄다이인 호죠 히데토키(北条英時)에게 누설돼, 히데토키는 그들에게 하카타로 출두할 것을 명했다.
같은 해 3월 12일, 키쿠치 타케토키는 아소 코레나오(阿蘇惟直) 등을 따라 갔으나, 탄다이로부터 지각을 이유로 책망을 받았다. 계획이 누설됐음을 알아챈 타케토키는 궐기를 압박했지만, 쇼니와 오토모 두 씨족은 이를 거절했다.
3月13日早朝、菊池武時・阿蘇惟直らは決意を固め手勢150騎で探題の館に攻め込んだ。しかし少弐・大友両氏は裏切って探題側に付き、激戦となる。菊池勢は武時以下ことごとく討ち死にする中、嫡男・菊池武重はかろうじて肥後へ逃れることができた。1978年、福岡市地下鉄工事の際、博多区祇園町東長寺前からおよそ110の頭蓋骨が発見された。分析の結果14世紀のものとみられ、博多合戦で敗れさらし首にされた菊池一党の武士のものと見なされている。
3월 13일 이른 아침, 키쿠치 타케토키와 아소 코레나오 등은 결의를 굳히고, 수하에 있는 기병 150기를 끌고 탄다이의 저택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쇼니・오토모 두 씨족은 타케토키를 배신하고 탄다이 측에 붙었고, 이내 격전이 벌어졌다.
키쿠치 세력은 타케토키 이하 전부가 토벌당해 죽게 된 가운데, 적남인 키쿠치 타케시게(菊池武重)는 간신히 히고로 도망칠 수 있었다. 1978년 후쿠오카시 지하철 공사 때, 하카타구 기온정 토쵸사(東長寺) 앞에서 110여개의 두개골이 발견됐다. 분석 결과 14세기의 것으로 보이며, 하카타 전투에서 패해 참수된 키쿠치 일당의 무사들의 것으로 보인다.
北条英時は肥後国守護の北条高政に菊池・阿蘇氏の討伐を命じた。規矩高政らが率いる討伐軍に本拠地を攻め込まれた両氏は現在の五ヶ瀬町にあったと推測される日向国鞍岡城に逃げ込むも攻め入られ、鞍岡山に逃れた一部を除き多くが討死した。この一連の事件によって、菊池氏は少弐・大友両氏に対し、拭い難い程深い恨みを持つこととなった。
호죠 히데토키는 히고국 슈고인 호죠 타카마사(北条高政)에게 키쿠치・아소씨 토벌을 명했다. 키쿠 타카마사(規矩高政) 등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본거지를 공격당한 두 씨족은 현재의 고카세정(五ヶ瀬町)에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휴가국(日向国) 쿠라오카성(鞍岡城)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쿠라오카산(鞍岡山)으로 도망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토벌당해 죽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키쿠치씨는 쇼니・오토모 두 씨족에 대해 씻기 어려운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建武の新政と肥後武士
켄무의 신정과 히고무사
このように九州での倒幕運動は一度は失敗に帰したが、中央では足利尊氏が、鎌倉でも新田義貞が反旗を翻した。少弐・大友両氏も倒幕に転じ、鎮西探題を攻め落とした。こうして鎌倉幕府は倒壊し、隠岐から京都へ戻った後醍醐天皇の下、公卿や楠木正成ら武士が輔弼した天皇親政が始まった。
이처럼 큐슈에서의 도막(막부 타도) 운동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앙에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카마쿠라에서도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반기를 들었다. 쇼니・오토모 두 씨족도 도막 쪽으로 돌아서서, 친제이탄다이를 쳐부쉈다.
그리하여 카마쿠라 막부는 붕괴되고, 오키(隠岐)에서 쿄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의 아래, 공경과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등 무사가 보필한 천황의 친정이 시작됐다.
新政府は政権交替の論告において、肥後武士を高く評価した。菊池氏嫡男・武重は肥後守の官職を得、武敏(掃部頭)・武茂・武澄(肥前守)ら兄弟も要職を授けられ顕彰された。阿蘇氏もまた、北条氏に奪われていた大宮司任命権を『官社開放令』によって取り戻し、勢力の回復に繋がった。これらは、多くの郎党が無念の死を遂げた肥後武士団の溜飲を下げ、彼らをして後に「南朝一辺倒」と言われる程の宮方(南朝方)傾倒に駆り立てる動機となった。
신정부는 정권교체의 논고(論告)에서 히고의 무사를 높게 평가했다. 키쿠치씨의 적남 타케시게는 히고노카미의 관직을 얻었고, 형제인 타케토시(武敏, 카몬노카미(掃部頭[2])), 타케모치(武茂), 타케즈미(武澄, 히젠노카미)도 요직을 받아 그 공적에 대한 표창을 받았다. 아소씨도 호죠씨에게 빼앗겼던 대궁사 임명권을 ‘관사개방령’(官社開放令)에 따라 되찾고 그 세력을 회복했다.
이러한 조치는 많은 가신들이 원통하게 생을 마감한 히고 무사단의 불만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또한, 히고 무사단이 훗날 ‘남조 일변도’라고 불릴 정도로 남조 측(또는 궁방, 宮方)으로 경도되는 동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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