火の国の成り立ち
히노쿠니(히국)의 성립
初期のヤマト王権は、地方行政区画として県(あがた)を設置した。『日本書紀』・『筑後国風土記』には、のちの熊本県域に3つの県の記載がある。球磨県はその名称が現在も引き継がれ、閼宗県(あそ-)は阿蘇地方に対応する。八代県は現在の宇土地方を含むより広い領域を含んでいたと考えられる。緑川と氷川に挟まれた宇土半島基部では塚原古墳群に代表される120前後の前方後円墳が発掘されているが、この中のひとつ向野田古墳(宇土市松山町)には30代と推定される未婚女性が埋葬されていた。
초기의 야마토 왕권은 지방 행정구역으로 현(아가타)을 설치했다. 《일본서기》, 《치쿠고국 풍토기》에는 훗날 쿠마모토현의 영역에 3개의 현(아가타)가 기재돼 있다. 쿠마현(球磨県)은 그 명칭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아소현(閼宗県)은 지금의 아소 지방에 대응한다. 야쯔시로현(八代県)은 현재의 우토 지방을 포함한 보다 넓은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
미도리가와강(緑川)과 히카와강(氷川) 사이에 있는 우토반도의 기부(基部, 뿌리부분)에는 츠카하라(塚原)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약 120곳의 전방후원분이 발굴됐다. 이 중 하나인 무코노다(向野田) 고분(우토시 마쯔야마정)에는 30대로 추정되는 미혼 여성이 매장돼 있다.
宇土半島基部の遺跡は、装飾文様が施された国越古墳や氷川流域の丘陵部に形成された野津古墳群などに代表され、この地域は火君(ひのきみ)発祥の地とされている。火君は地域を代表する豪族であり、『古事記』では神八井耳命(かみやいみみのみこと)の後裔として、『日本書紀』や『肥前国風土記』では熊襲討伐を果たした景行天皇一行が不思議な火に誘われて至った地で土蜘蛛退治に活躍した者の子孫として記されている。そして、この故事から「火国(ひのくに)」の名称が生まれたとされる。
우토반도 기부의 유적은 장식 문양이 입혀진 쿠니고시(国越) 고분이나 히카와 강 유역의 구릉부에 형성된 노즈(野津) 고분군 등으로 대표되며, 이 지역은 히노키미(火君, 화군)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히노키미는 지역을 대표하는 호족으로, 《고사기》에서는 카미야이미미노 미코토(神八井耳命)의 후손으로, 《일본서기》나 《히젠국 풍토기》에서는 쿠마소(熊襲) 토벌을 이뤄낸 케이코 천황(景行天皇) 일행이 신비로운 불에 이끌려 도착한 땅에서 츠찌구모(土蜘蛛[1]) 퇴치에 활약한 자의 자손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 고사에서 ‘히노쿠니’(火国)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江田船山古墳から出土した大刀銘文から、火君など火の国の豪族は既に近畿の大伴・物部氏と関係を持っ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ている。豪族のひとつ建部君(たけべのきみ)は、その名が大和朝廷から軍事的部民として名を下賜された一族で、現在は熊本市黒髪・子飼本町に相当する中世までの地名武部・竹部・建部あたりを本拠としていたと思われる。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대도의 명문(銘文)에서, 히노키미 등 히노쿠니의 호족은 이미 킨키(近畿, 지금의 칸사이 지방)의 오토모(大伴), 모노노베(物部)씨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밝혀졌다. 호족의 하나인 타케베노키미(建部君)는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군사적 부민(部民[2])으로 이름을 하사받은 일족이다. 그들은 현재의 쿠마모토시 쿠로카미(黒髪), 코카이(子飼) 본정에 해당하는 지역 즉, 중세까지의 지명인 타케베(武部・竹部・建部) 인근을 본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菊池川流域で発掘される古墳群は少々時代が下り、竜王山古墳(山鹿市)・山下古墳(玉名市)・院塚古墳(岱明町)が知られ、これらは日置部君(ひおきべのきみ)一族の地とみなされる。阿蘇一宮町にある中通古墳は阿蘇君(あそのきみ)の築造とされる。これらの墳墓から発掘される貝輪などは、当時の豪族がさかんな交易を行なっ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さらに、阿蘇溶結凝灰岩から作られた舟形石棺が瀬戸内海沿岸や近畿地方の古墳にも用いられていることから、この交易は相当広範囲にわたる規模のもので、豪族たちの権勢を支えていたと推測される。県全体で確認された古墳は約1300程を数え、これは国内の24%に当たる。
키쿠치 강(菊池川) 유역에서 발굴된 고분군은 조금 시대가 내려간 것으로, 야마가시의 류오산(竜王山) 고분, 타마나시의 야마시타(山下) 고분, 타이메이정(岱明町)의 인즈카(院塚) 고분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히오키베노키미(日置部君) 일족의 땅으로 여겨진다. 아소 이치노미야정(阿蘇一宮町)에 있는 나카도오리(中通) 고분은 아소노키미(阿蘇君)가 축조했다고 한다. 이들 분묘에서 발굴된 조개팔찌 등은 당시의 호족이 활발한 교역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아소 용결응회암(溶結凝灰岩)으로 만든 배 모양 석관이 세토 내해 연안과 킨키 지방의 고분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 교역은 상당히 광범위한 규모의 것으로, 호족들의 권세를 뒷받침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현 전체에서 확인된 고분은 약 1300 곳으로, 일본 국내의 24%에 해당한다.
磐井の乱以後、九州への支配体制を強化した大和朝廷は、当地の軍事力の再編成や屯倉の設置など支配力を強化した。この一連の中で、火の国には大伴氏の部民が多く配された。これらは、『万葉集』巻5、『和名類聚抄(和名抄)』、東大寺出土木簡などの記述から見いだせる。『日本書紀』にある火の国の春日部屯倉(熊本市春日町)は九州中南部の豪族反乱へ睨みを利かす朝廷の出先機関という性格を有し、軍事的かつ経済的拠点としても機能した。『隋書』の中に阿蘇山噴火を記した下りがある。これは遣隋使が行われた推古天皇期に伝えられた情報と考えられており、火の国が大和朝廷にとって重要な拠点のひとつだったことを示す傍証にもなっている。
이와이(磐井)의 난 이후, 큐슈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한 야마토 조정은, 현지 군사력을 재편성하고, 둔창을 설치하는 등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히노쿠니에는 오토모씨(大伴氏)의 부민이 많이 배치됐다. 이들은 《만엽집》 권5, 《화명류취초》[3](和名類聚抄, 和名抄), 토다이 사(東大寺) 출토 목간 등의 기술에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있는 히노쿠니의 카스가베 둔창(쿠마모토 시 카스가 정)은 큐슈 중남부의 호족 반란을 엄중히 감독하는 조정의 출장기관이라는 성격이 있었으며, 군사, 경제적 거점으로서도 기능했다.
《수서》에는 아소산 분화를 기술한 문장이 있다. 이는 견수사가 활동했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기에 전해진 정보로 추정되며, 히노쿠니가 야마토 조정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음을 나타내는 방증이기도 하다.
고분군 지도
노즈 고분
츠카하라 고분
[1]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땅거미’로, 히고 뿐만 아니라 일본 각지에 츠찌구모 관련한 전설이 있다
[2] 일본의 야마토시대에 황실이나 호족에 예속되어 특정한 의무를 맡은 사람
[3] 화명류취초 : 헤이안시대 중기인 조헤이(承平) 연간(931~938년)에 편찬된 사전으로, 한자어 명사에 만요가나로 일본어식 읽는법을 붙인 후, 그 설명을 덧붙였다. 유취(類聚) : 종류에 따라 모음, 초(抄) : 필요한 부분만 뽑아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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