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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

쿠마모토현의 역사 5 - ‘히고’ 명칭의 유래

by kumamon.kr 2023.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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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복원한 키쿠치성의 유적

히고명칭의 유래

 

令制「肥後」が史書に初めて記されたのは、『日本書紀』持統十年四月戊戌紀にある白村江のいで捕虜となり33年ぶりに帰国した兵士「肥後皮石郡(合志郡)人の壬生諸石(みぶのもろいし)」について記述した箇所に見られる。朝廷は、帰国した彼と家族の苦にし水田や物品をえ、またの免除などを以って報いたとある。

 

율령국인히고국이 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일본서기> 지토(持統) 10 4월 무술(戊戌)기다. 여기에는 백촌강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33년만에 귀국한 병사히고국 카하시군(皮石郡, 현 코시군(合志郡)) 사람 미부노모로이시(壬生諸石)’에 대해 기술된 부분이 있다. 조정은 귀국한 그와 가족의 노고에 대해 논과 물품을 주고, 또한 세금 면제 등으로 보답했다고 한다.

 

日本書紀の次に編纂された「日本紀」文武二年五月二十五日に、鞠智城繕治の件を載せている。これは唐新羅連合軍寇に備え、大宰府を防衛する大野城基肄城と同時期に現在の山鹿市(菊鹿町)に建設されたものである。ただし鞠智城は武器や兵糧の供給または防人が控える支援基地としての性格がかった。

 

일본서기 다음으로 편찬된 <속일본기> 몬무(文武) 2 5 25일조에 키쿠치성(鞠智城) 수리의 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나당 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다자이후(大宰府)를 방어하는 오노성(大野城), 키이성(基肄城)과 같은 시기에 지금의 야마가시(山鹿市, 구 키쿠카정)에 건설된 것이다. 다만 키쿠치성은 무기와 군량의 보급 및 방인(防人[1])이 대기하는 지원기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律令制においては肥後にも府が置かれ、その場所は『和名類聚抄』には益城郡、『伊呂波字類抄』には飽田郡(熊本市二本木)、鎌倉時代の『拾芥抄』では益城飽田郡のふたつが記されている。一方で地名としての「府」は託麻郡(熊本市府)にあり、『日本異記』宝亀年間頃の話には「託麻分寺」という記述がある。掘が行なわれたところ熊本市府から9世紀中ごろの遺構が見されたが、これには洪水による破の痕跡が見られた。この見から、初は託麻にあった府が水害を被り、益城飽田の何れかに移したものと考えられている。ただし、これを裏付ける遺跡や遺物の見には未だ至っていない。

 

율령제에 따라 히고국에도 국부([2])가 설치됐는데, 그 장소는 출처마다 다르게 나온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마시키군, <이로하자류초>(伊呂波字類抄[3])에는 아키타군(飽田郡, 현 쿠마모토시 니혼기), 카마쿠라 시대에 지어진 <습개초>(拾芥抄[4])에는 마시키, 아키타군의 2개가 병기돼 있다. 한편 지명으로서의국부’(코쿠후)로는 타쿠마군(쿠마모토시 코쿠후)이 있으며, <일본영이기>(日本異記[5])의 호키(宝亀, 770~781) 연간 무렵의 전설에는타쿠마 국분사(分寺[6])’라는 기술이 있다. 발굴 결과 쿠마모토시 코쿠후에서 9세기 중엽의 유구가 발견됐는데, 여기에는 홍수에 의한 파괴의 흔적이 발견됐다. 이 발견을 통해, 당초 타쿠마에 있었던 국부가 수해를 입어, 마시키, 아키타 중 어딘가로 이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를 뒷받치는 유적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히고의 초대 국사인 미치노키미 오비토나

一方で官職「肥後守(ひごのかみ)」は『風藻』に五音詩「秋宴」を載せた作者「正五位下肥後守道公首名(ひごのかみみちのきみおびとな)」に見られる。道公首名は663年に北陸の道君一族に生まれ、新羅大使や筑後守をて兼任肥後守に就任した。『日本紀』には首名の系譜や生涯などと優れた業績を記した「卒」があり、治水灌漑のための溜池「味生池(あじうのいけ)」(現:熊本市立池上小校北側一)を築いた事例などが載せられている。日本紀では通常「卒」は僧侶を除き律令官位制五位以下の者は記しないが、正五位の道公首名だけは生前の記にたる「卒」が詳細に記されている。これは、首名の地方行政が律令下の範たるものであったことに加え、天智天皇と道君一族の越道君伊勢羅都(こしのみちのきみいらつめ)の間に生まれた志貴皇子が光仁天皇の父であり、『日本紀』編纂期の天皇と血にあったことも影響していると考えられる。

 

한편, 관직명히고노카미’(肥後守) <회풍조>(風藻)[7]에 오음시추연’(秋宴, 가을잔치)의 작가인 정오위하 히고노카미 미치노키미 오비토나(道公首名)’에서 볼 수 있다. 미치노키미 오비토나는 663년에 호쿠리쿠(北陸)의 미치노키미 일족에서 태어나, 신라 대사와 치쿠고노카미(筑後守)를 거쳐 겸임 히고노카미에 취임했다. <속일본기>에는 오비토나의 계보와 생애 등 뛰어난 업적을 기록한졸전’()이 있는데, 치수관개를 위한 저수지아지우노이케’(味生池, 현 쿠마모토 시립 이케노우에 소학교 북측 일대)를 만든 사례 등이 실려 있다. 속일본기에서는 보통졸전에 승려를 제외한 율령관위제 5위 이하의 사람은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5위인 미치노키미 오비토나만은 생전의 전기에 해당하는졸전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는 오비토나의 지방행정이 율령 하의 모범이었던 데다가, <속일본기> 편찬기의 천황과 혈연관계가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텐지 천황(天智天皇)과 미치노키미 일족인 코시노미치노키미 이라쯔메[8](越道君伊勢羅都)의 사이에서 태어난 시키황자(志貴皇子)가 코닌 천황(光仁天皇)의 아버지인데, <속일본기>의 전반부는 코닌천황 시대에 편찬됐다.

 

肥後の司には、この道公首名の他に紀夏井、藤原保昌らも赴任し、平安時代の・清原元輔と肥後の女歌人檜垣嫗との交流についてはさまざまな話がされている。

 

히고의 국사(, 지방관)에는 미치노키미 오비토나 외에 키노 나츠이(紀夏井),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 등이 부임했으며, 헤이안 시대의 국사인 키요하라노 모토스케(原元輔)와 히고의 여류 시인 히가키노오나(檜垣嫗)의 교류에 대한 여러 전설이 남아 있다.



[1] 防人(방인, 사키모리, 보진) : 일본 고대시대에 북큐슈 지역을 방위하던 병사 제도. 663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큐슈 연안 방어를 위해 설치됐다. 이전부터 곶을 수비하는 岬守라는 말이 있어 사키모리 읽기도 하는데, 한자만 당나라 제도인 防人에서 따왔다고 한다.

[2] (국부, 코쿠후) : 율령제에서 지방 행정구역인 설치된 지방행정관청 또는 소재지. 같은 말로 국아(国衙, 코쿠가)

[3] 伊呂波字類抄(또는 色葉字類抄, 이로하지루이쇼) : 헤이안시대 말기에 성립한 사전류의 .

[4] 拾芥抄(습개초, 슈가이쇼) : 중세 일본의 백과사전. 습개(拾芥) : 티끌을 줍는 일이라는 뜻으로, 명예나 부귀 따위를 쉽게 얻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출전은 한서 하후승(夏侯勝) 열전.

[5] 日本異記(니혼료이키) : 헤이안 시대 초기 쓰여진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설집. 전체 이름은 <일본국현보선악영이기>(日本現報善悪霊異記)

[6] 分寺(국분사, 코쿠분지) : 741 쇼무천황이 불교를 통한 호국의 목적으로 각국에 세운 .

[7] 風藻(카이후소)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한시집. 선배 대시인들의 유풍()을 그리워하는() 사조집()이라는 의미.

[8] 이라쯔메(いらつめ) : 낭자()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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