源平の狭間で 겐페이의 틈새에서
保元の乱以降、平清盛が大宰大弐に就任すると、肥後国を含む九州には平家の影響力が強く及び始めた。院政権力と結び、王領荘園の領家や預所職を一族で占め、また受領として国衙の行政権を掌握した。この動きに地方の武士団は、平家の軍門に下るか、もしくは反抗を試みるかの二者択一を迫られた。当時の菊池氏棟梁・隆直が選んだのは後者の道だった。治承4年(1180年)、菊池隆直は大宮司阿蘇惟安や木原次郎盛実など肥後の有力武将と組み立ち上がった。この鎮西反乱は、『玉葉』では「筑紫の反乱」と、終結した年号から「養和の内乱」とも呼ばれる。数万の兵を以って一時は大宰府にまで攻め入った肥後勢ではあったが、平家側の働きかけにより朝廷は原田種直に反乱分子を意味する「鎮西の賊」菊池隆直追討の宣旨を下し、平貞能を追討使として九州に派遣した。押され始めた肥後一党は本拠を攻め込まれ、養和2年(1182年)4月には降伏、肥後の武士団は平家方に組み込まれた。
호겐(保元)의 난 이후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다자이다이니(大宰大弐, 다자이후의 차관 중 상위)에 취임하자, 히고국을 비롯한 큐슈에는 헤이케(平家)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기 시작했다. 헤이케는 인세이 권력과 결탁하여, 왕령장원(王領荘園)의 영가나 아즈카리도코로(預所[1]) 직을 그 일족이 차지했으며, 또한 즈료(受領, 실제 현지를 다스리는 지방관)로써 국아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런 움직임에 지방의 무사단은 헤이케에 자발적으로 복속하던지, 아니면 반항을 시도하던지 양자 택일을 강요받았다.
당시 키쿠치씨의 동량이었던 키쿠치 타카나오(菊池隆直)가 선택한 것은 후자의 길이었다. 지쇼(治承) 4년(1180년), 키쿠치 타카나오는 대궁사인 아소 코레야스(阿蘇惟安)와 키하라 지로 모리자네(木原次郎盛実) 등 히고의 유력 무장과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친제이 반란은 《교쿠오》(玉葉[2])에서는 ‘치쿠시의 반란’이라고 하며, 당시 연호에서 따온 ‘요와(養和)의 내란’이라고도 한다.
수만의 군사를 거느린 히고 군세는 한때 다자이후까지 쳐들어갔다. 하지만 헤이케 측이 손을 써서 조정은 하라다 타네나오(原田種直)에게 반란분자를 뜻하는 ‘친제이의 적’ 키쿠치 타카나오를 추토하라는 선지를 내렸다. 또한 타이라노 사다요시(平貞能)를 추토사로 큐슈에 파견했다. 밀려나기 시작한 히고 세력은 본거지마저 공격을 당해, 요와 2년(1182년) 4월에 항복했고, 이후 히고의 무사단은 헤이케 측에 편입됐다.
『吾妻鏡』・『平家物語』・『源平盛衰記』また『歴代鎮西要略』では、この「鎮西反乱」は勃興と同年伊豆で挙兵した源頼朝に呼応したものとされるが、実態は異なり地方勢力の反乱であった。それどころか、寿永2年(1183年)に安徳天皇を奉じて九州に落ち延びた平家に従った菊池隆直を、鎌倉幕府は平家に組した「張本の輩」と断じた。ただし、菊池氏は鎌倉時代も御家人として存続した点から「鎮西反乱」が源氏方にも考慮された可能性は否定できない。また、当時既に球磨地方の多良木荘に拠った相良氏も平家方として活動したが、幕府成立後に謝意を示して許されたとされる。しかし、これは逆に罰を受けて氏族本拠の遠江国相良荘を追放された結果との説もある。
《아즈마카가미》(吾妻鏡[3]),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 《역대 친제이 요략》(歴代鎮西要略)에서는 이 ‘친제이 반란’이 같은 해에 이즈(伊豆)에서 거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에 호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별도로 일어난 지방세력의 반란이었다. 오히려 쥬에이(寿永) 2년(1183년)에 안토쿠(安徳) 천황을 모시고 큐슈로 달아난 헤이케를 따랐던 키쿠치 타카나오에 대해 카마쿠라 막부는 헤이케의 편을 든 ‘나쁜 무리’(張本の輩)라고 판단했다. 다만, 키쿠치씨는 카마쿠라 시대에도 고케닌(御家人)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친제이 반란’이 겐지의 편을 든 것으로 고려됐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당시에 이미 쿠마 지방의 타라기(多良木) 장원에 자리잡은 사가라씨(相良氏)도 헤이케 쪽으로 활동했으나, 막부 성립 후에 사과의 뜻을 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른 설로는 사가라씨가 벌을 받아 씨족의 본거지인 토토미국(遠江国[4])의 사가라 장원에서 추방당한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다.
阿蘇氏・木原氏という有力武士団を配下に反乱を起こした菊池隆直は当時「一国棟梁」に最も近い位置にいたが、結果「養和の内乱」は中央の武家権力による肥後支配を呼び込む役割を担ってしまった。また、球磨一郡を範囲としていた球磨荘が平家没官領とみなされて鎌倉幕府によって解体され、その一部であった人吉荘は後に相良氏に与えられることになった。
아소씨・키하라씨라는 유력 무사단을 휘하에 두고 반란을 일으킨 키쿠치 타카나오는 당시 ‘일국 동량’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요와의 내란’은 중앙의 무가권력(막부)에 의한 히고 지배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또한, 쿠마 1군을 범위로 하고 있던 쿠마 장원이 헤이케 몰관령(平家没官領)로 간주돼 카마쿠라 막부에 의해 해체됐다. 쿠마 장원의 일부였던 히토요시 장원은 나중에 사가라씨에게 수여됐다.
熊本県やその近郊には、平家の落ち人伝説が残る。その場所としては、八代市泉町五家荘、隣接する宮崎県椎葉村などが知られている。
쿠마모토현이나 그 근교에는, 헤이케의 낙인(落人[5])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장소로는 야쯔시로시 이즈미정의 다섯 집의 장원(五家荘, 고카노쇼), 인접한 미야자키 현의 시이바 촌(椎葉村) 등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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