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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34

쿠마모토 편집샵의 개척자 '퍼머넌트 모던' 폐점소식 출처 : 2024. 11. 20. 자 쿠마니치사와모토 마리코(澤本麻里子),  쿠마모토시 중앙구 신시가이 샤워도리(シャワー通り) 길가에 위치한 패션 편집샵 '퍼머넌트 모던'(PERMANENT MODERN)이 11월 말로 문을 닫는다. 대표 아리타 마사히로 씨(有田正博, 72세)는 토쿄보다 앞서서 수입 브랜드를 매입해 최첨단 패션을 제시해 온 편집샵의 개척자로, 업계에서도 누구나 알아주는 존재이다. 은퇴를 결심한 아리타 씨를 찾아 현재 심경을 물었다.  ​아리타 마사히로 씨는 1952년 야츠시로시(八代市) 태생으로 토쿄와 쿠마모토의 남성복 가게에서 근무하다가, 1976년에 '아웃도어 스포츠'를 개점했다. 쿠마모토시 중앙구 신시가이 주변에서 'Lope', 'BLAZE' 등 독특한 편집샵을 잇달아 열었다. 19.. 2024. 11. 22.
쿠마모토현의 역사 21 - 항만도시의 발달 항만도시의 발달 중세 후기 일본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교역도 활발해졌다. 히고에도 외국까지 알려진 항만도시가 발달했다. 타카세(高瀬, 현 타마나시)는 하쿠자키궁(筥崎宮)령에 속하며, 키쿠치강과 하네기강(繁根木川) 하구에 낀 교통의 요지였다. 카마쿠라 시대에는 시종(時宗[1])의 간교사(願行寺) 등이 건립됐고, 명나라에 도해하기 전에 젯카이 츄신(絶海中津)도 들렀다고 한다. 죠와(貞和) 3년/코코쿠(興国) 7년(1347년)에는 키쿠치 타케미쯔(菊池武光)의 동생 타케히사(武尚)가 호타기성(保田木城)을 쌓고 이후 타카세씨를 자칭했다. 타카세씨는 간교사를 비롯한 불각(仏閣)에 기부하고, 마을 정비 등에 힘써 객주(問屋)[2] 마을과 직인 마을의 형성에 기여했다. 조선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뤄졌는데, 나중에 타카.. 2024. 11. 20.
쿠마모토현의 역사 20 -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전국시대는 아마쿠사에도 찾아와 각 씨족은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에이로쿠 3년(1560년), 스모토씨(栖本氏)를 공격한 코쯔우라씨(上津浦氏)를 지원한 마쯔라 타카노부(松浦隆信)가 도입한 철포대의 위력이었다. 아마쿠사의 각 가문은 그 유효성을 인정하고 철포를 도입하기 위해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시키 시게츠네(志岐鎮経)는 쿠치노츠(口之津)의 일본 포교장(布教長)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루이스 드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시키(志岐)로 떠나 교회당을 지었다. 또한 그는 시게츠네에게 세례를 실시하여 ‘돈 조안’이라는 세례명을 .. 2024. 11. 18.
쿠마모토현의 역사 19 -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된 히고 각축장이 된 히고 일단 평안을 찾은 오토모씨의 지배도 머지 않아 균열이 생겼다. 히고는 여러 세력이 각축장(草刈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에이로쿠 2년(1559년), 현재의 키쿠치정에서 각자가 국인으로서 독자성을 내세운 구 키쿠치 가신 사이의 권력다툼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아카호시 치카이에(赤星親家)가 아와세가와(合勢川)의 전투에서 쿠마베 치카나가(隈部親永)에게 패하자, 그 아들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統家)는 오토모씨에게 의탁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쿠마베씨는 히젠의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태는 텐쇼 6년(1578년) 11월, 미미카와강의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패배하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류조지씨는 이것을 호기로 여기고 남하를 개시하여, 2년 후.. 2024. 11.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18 - 히고의 전국시대, 키쿠치씨의 멸망 히고의 전국시대 - 키쿠치씨 종가의 단절일본의 전국시대는 메이오의 정변(1493년) 혹은 오닌의 난(1467년)을 기점으로 하지만, 히고국의 전국시대는 키쿠치 요시카즈가 사망한 에이쇼(永正) 원년(1504년)을 시작으로 본다. 아소씨의 전성기아소씨의 내부 분쟁인 마카도바루의 전투(馬門原の戦い, 혹은 幕の平合戦. 장소는 현재의 야마토정 스기키 부근)에 키쿠치 시게토모가 개입했으나 패배한 이후, 키쿠치씨의 지배영역은 줄어들었고, 지도력도 현저히 저하됐다. 가독을 이은 시게토모의 아들 요시카즈는 직신의 저항에 부딪혀, 분키(文亀) 원년(1501년)에 시마바라(島原)로 망명했다. 그러자 일족은 합의 끝에 우토 타메미쯔(宇土為光)를 슈고로 삼았다. 2년 후, 요시카즈는 아소씨, 사가라씨 등과 제휴하고, 아마쿠사씨.. 2024. 11. 14.
쿠마모토현의 역사 17 - 히토요시, 야츠시로, 아마쿠사의 동향 히토요시와 야츠시로 남북조 시대에 쿠마 지방의 사가라씨는 타라기의 카미사가라 씨와 히토요시의 시모사가라 씨로 나뉘어 아소 씨처럼 서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교착상태를 매듭짓고 가문을 통일시킨 사람은 분안(文安) 5년(1448년) 카미사가라를 멸망시킨 사가라 나가츠구(相良長続)였다. 하지만 이 일은 본가에 대한 분가의 하극상으로 간주된다. 나가츠구는 슈고인 키쿠치 타메쿠니(菊池為邦)로부터 아시키타 군의 영유권을 획득했고, 칸쇼(寛正) 4년(1463년)에는 나와 아키타다(名和顕忠)를 도와준 대가로 타카다 향(현재의 야츠시로시 남부)도 영지로 편입시켰다. 사가라 씨의 원조를 받아 야츠시로 성으로 돌아온 나와 아키타다는 타카다 향을 아쉬워했다. 분에이 8년(1476년) 사츠마의 우시쿠소인(牛屎院)으로 사.. 2024. 3. 20.
쿠마모토현의 역사 16 - 무로마치 시대의 키쿠치씨와 아소 室町の肥後 무로마치 시대의 히고 菊池氏の盛衰 키쿠치씨의 성쇠 今川貞世が去り渋川満頼が九州探題に就くと、菊池氏はまたも反逆の姿勢を顕わにした。しかし、続く断続的な戦乱の中菊池氏は段々と衰え、代わって詫磨満親が勢力を伸ばした。しかしこれも一時期なもので、南北朝時代に名を馳せた河尻氏とともに応永年間には目立った活躍を見せなくなった。 이마가와 사다요가 떠나고 시부카와 미츠요리(渋川満頼)가 큐슈 탄다이에 취임하자, 키쿠치 씨는 다시 반역의 자세를 드러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간헐적인 전란 속에 키쿠치 씨는 점점 쇠퇴하고, 대신 타쿠마 미츠치카(詫磨満親)가 세력을 넓혔다. 하지만 이 역시 한때의 일로, 타쿠마 씨와 남북조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카와시리 씨는 오에이 연간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菊池氏は一時的に勢いを取り戻す。菊池兼朝は.. 2024. 3. 2.
쿠마모토현의 역사 15 - 정서부의 성립과 붕괴 征西府の成立と崩壊 정서부의 성립과 붕괴 康安元年/正平16年(1361年)、懐良親王は宇土到着から18年を経て大宰府に入り、征西府を置いて北部九州を掌握した。その政治機構は、父・少弐頼尚に背いて南朝方に着いていた少弐頼澄を筆頭とする12人の府官によって成ったが、実際は肥後守護となった菊池武光ら菊池一族が握った。この頃には中央での南朝勢力は衰えていたため、征西府は幕府から独立した軍事政権の様相を帯びた。これは明や高麗との国交において顕著で、貿易権の掌握や、倭寇取締りを求める明からの使節が征西府に赴いたところや、明が「良懐」すなわち懐良親王を「日本正君」に冊封したところからも窺える。 코안(康安) 원년/쇼헤이 16년(1361년), 카네요시 친왕은 우토에 도착한지 18년 만에 다자이후에 입성해 정서부를 설치하고 북부 큐슈를 장악했다. 정서부는 아버지인 쇼니 요리히사를.. 2023. 11. 21.
쿠마모토는 왜 '불의 나라'라고 불릴까? 쿠마모토의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히고’란 단어가 쿠마모토와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껏 그 유래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히고’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고대사는 문헌자료가 적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신화의 영역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일본 신화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개념이 뒤섞여 있다. 게다가 내가 다루는 쿠마모토 지역은 일본 전체로 보면 변방이기 때문에 참고할 자료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한 최대로 자료를 취합해 히고의 유래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보는 글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히고’란 무엇인가 우선 ‘히고’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면 히고 국(肥後国)이다. 고대 시대 .. 2023. 8. 31.
쿠마모토현의 역사 14 - 히고의 '삼국지' 시대 三つの勢力 히고의 세 세력 この状況にさらに混沌をもたらす二つの存在が肥後国に向かっていた。一人目は南朝の征西大将軍・懐良親王であった。親王は伊予・薩摩を経て、貞和4年/正平3年(1348年)肥後の宇土に着いた。迎えた惣領を継いだ菊池武光を伴い、阿蘇惟澄の所領を通過して菊池氏の隈府山に入った。 이 상황에 더욱 혼돈을 가져올 두 존재가 히고 국을 향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남조의 정서대장군인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었다. 친왕은 이요(伊予)와 사쯔마(薩摩)를 거쳐, 죠와(貞和) 4년/쇼헤이(正平) 3년(1348년) 히고의 우토에 도착했다. 그는 총령의 자리를 이은 키쿠치 타케미쯔를 따라 아소 코레즈미의 영지를 통과해 키쿠치 가문의 와이후 산(隈府山)으로 들어갔다. そして二人目は足利直冬。足利尊氏の庶子ながら父に疎まれる、叔父足利直義の養子..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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