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27

쿠마모토현의 역사 17 - 히토요시, 야츠시로, 아마쿠사의 동향 히토요시와 야츠시로 남북조 시대에 쿠마 지방의 사가라씨는 타라기의 카미사가라 씨와 히토요시의 시모사가라 씨로 나뉘어 아소 씨처럼 서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교착상태를 매듭짓고 가문을 통일시킨 사람은 분안(文安) 5년(1448년) 카미사가라를 멸망시킨 사가라 나가츠구(相良長続)였다. 하지만 이 일은 본가에 대한 분가의 하극상으로 간주된다. 나가츠구는 슈고인 키쿠치 타메쿠니(菊池為邦)로부터 아시키타 군의 영유권을 획득했고, 칸쇼(寛正) 4년(1463년)에는 나와 아키타다(名和顕忠)를 도와준 대가로 타카다 향(현재의 야츠시로시 남부)도 영지로 편입시켰다. 사가라 씨의 원조를 받아 야츠시로 성으로 돌아온 나와 아키타다는 타카다 향을 아쉬워했다. 분에이 8년(1476년) 사츠마의 우시쿠소인(牛屎院)으로 사.. 2024. 3. 20.
쿠마모토현의 역사 16 - 무로마치 시대의 키쿠치씨와 아소 室町の肥後 무로마치 시대의 히고 菊池氏の盛衰 키쿠치씨의 성쇠 今川貞世が去り渋川満頼が九州探題に就くと、菊池氏はまたも反逆の姿勢を顕わにした。しかし、続く断続的な戦乱の中菊池氏は段々と衰え、代わって詫磨満親が勢力を伸ばした。しかしこれも一時期なもので、南北朝時代に名を馳せた河尻氏とともに応永年間には目立った活躍を見せなくなった。 이마가와 사다요가 떠나고 시부카와 미츠요리(渋川満頼)가 큐슈 탄다이에 취임하자, 키쿠치 씨는 다시 반역의 자세를 드러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간헐적인 전란 속에 키쿠치 씨는 점점 쇠퇴하고, 대신 타쿠마 미츠치카(詫磨満親)가 세력을 넓혔다. 하지만 이 역시 한때의 일로, 타쿠마 씨와 남북조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카와시리 씨는 오에이 연간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菊池氏は一時的に勢いを取り戻す。菊池兼朝は.. 2024. 3. 2.
쿠마모토현의 역사 15 - 정서부의 성립과 붕괴 征西府の成立と崩壊 정서부의 성립과 붕괴 康安元年/正平16年(1361年)、懐良親王は宇土到着から18年を経て大宰府に入り、征西府を置いて北部九州を掌握した。その政治機構は、父・少弐頼尚に背いて南朝方に着いていた少弐頼澄を筆頭とする12人の府官によって成ったが、実際は肥後守護となった菊池武光ら菊池一族が握った。この頃には中央での南朝勢力は衰えていたため、征西府は幕府から独立した軍事政権の様相を帯びた。これは明や高麗との国交において顕著で、貿易権の掌握や、倭寇取締りを求める明からの使節が征西府に赴いたところや、明が「良懐」すなわち懐良親王を「日本正君」に冊封したところからも窺える。 코안(康安) 원년/쇼헤이 16년(1361년), 카네요시 친왕은 우토에 도착한지 18년 만에 다자이후에 입성해 정서부를 설치하고 북부 큐슈를 장악했다. 정서부는 아버지인 쇼니 요리히사를.. 2023. 11. 21.
쿠마모토현의 역사 14 - 히고의 '삼국지' 시대 三つの勢力 히고의 세 세력 この状況にさらに混沌をもたらす二つの存在が肥後国に向かっていた。一人目は南朝の征西大将軍・懐良親王であった。親王は伊予・薩摩を経て、貞和4年/正平3年(1348年)肥後の宇土に着いた。迎えた惣領を継いだ菊池武光を伴い、阿蘇惟澄の所領を通過して菊池氏の隈府山に入った。 이 상황에 더욱 혼돈을 가져올 두 존재가 히고 국을 향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남조의 정서대장군인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었다. 친왕은 이요(伊予)와 사쯔마(薩摩)를 거쳐, 죠와(貞和) 4년/쇼헤이(正平) 3년(1348년) 히고의 우토에 도착했다. 그는 총령의 자리를 이은 키쿠치 타케미쯔를 따라 아소 코레즈미의 영지를 통과해 키쿠치 가문의 와이후 산(隈府山)으로 들어갔다. そして二人目は足利直冬。足利尊氏の庶子ながら父に疎まれる、叔父足利直義の養子.. 2023. 8. 27.
쿠마모토현의 역사 13 - 남조에 충의를 지킨 히고 무사단 南朝一辺倒 남조 일변도 天皇親政下の政策は、拙速な改革や朝令暮改、恩賞の不公平や新課税など多くの問題をはらんだもので、親政権は急速にその支持を失っていった。建武2年(1335年)足利尊氏は鎌倉で反親政に乗り出し、後醍醐天皇は新田義貞を討伐に差し向けた。天皇に近侍していた菊池武重・武吉兄弟は「菊池千本槍」を携え、また阿蘇惟時・惟直親子も共に新田軍に加わって、箱根・竹ノ下の戦いに参戦した。この時、阿蘇親子に向けた「後醍醐天皇綸旨」が「阿蘇家文書」として現存している。しかし新田方は破れ、京都までの退却をも追われた。菊池武重は殿軍として足利直義を退ける活躍を見せ、建武3年/延元元年(1336年)には京都・大渡橋の戦いでも尊氏軍を迎撃した。その後武重は比叡山に逃れた後醍醐天皇に付き従い、そのまま軟禁された。 천황 친정하의 정책은 졸속 개혁과 조령모개, 은상의 불공평과 새로운 과세 등 .. 2023. 8. 25.
쿠마모토현의 역사 12 - 남북조 시대에 돌입하다 南北朝の時代 남북조 시대 博多合戦は憎しみ深く 하카타 전투로 생긴 깊은 원한 後醍醐天皇の討幕運動に呼応し護良親王が発した北条高時討伐の令旨は、九州の各武士団にも届いた。元弘3/正慶2年(1333年)初頭、当時の菊池氏棟梁・武時は、筑後の少弐貞経・豊後の大友貞宗とともに鎮西探題を攻撃する密約を交わし、その準備にかかった。しかし、この計画は探題の北条英時に漏れ、英時は彼らに博多への出頭を命じた。同年3月12日菊池武時は阿蘇惟直らを従い向かったが、探題から遅参を責められた。計画漏洩を察した武時は決起を働きかけたが少弐・大友両氏はこれを拒絶した。 고다이고 천황의 토막 운동에 호응하여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내린 호죠 타카토키(北条高時) 토벌의 명령서는 큐슈의 각 무사단에게도 전달됐다. 켄코(元弘) 2년・쇼쿄(正慶) 2년(1333년) 초엽, 당시 키쿠치씨의 .. 2023. 8. 24.
쿠마모토현의 역사 11 - 히고 땅에 불교가 퍼지다 得宗専制の影響 토쿠슈[1] 전제정치의 영향 訴え出た竹崎季長は最終的に恩賞を得たが、彼のように武功を挙げながら何ら褒章を受けられなかった者は多く、御家人の貧窮化が進んだ。さらに寛元4年(1246年)執権に就任した北条時頼は幕府権力の掌握と反北条氏勢力の排除を強め、元寇という外患も利用し、北条一門による専制体制を固めた。肥後国に与えた影響も大きく、弘安徳政で事の是正を試みた安達泰盛が廃された霜月騒動以後の守護職は得宗または北条氏族が独占し、一国平均の役で課される税の徴収など本来国司が持つ権限も守護が担うようになった。得宗領とされた荘園も多く、菊池荘や熊本平野の各荘園・八代や球磨郡および天草・寛元2年(1244年)に相良氏から奪った人吉荘北方など、肥後国内全域に及んだ。所領を奪われたり、安堵・自立を脅やかされるなど矛盾を含んだ政治は多くの不満不平を生じ、反体制勢力である「悪党」の発生に.. 2023. 8. 17.
쿠마모토현의 역사 10 - 몽골의 침략(몽고습래) 鎌倉政権下の肥後 카마쿠라 정권 하의 히고 文治の勅許によって守護・地頭が設置されると、平家方にあった肥後国では東国武士が多く惣地頭の職を占めた。「張本の輩」とされた菊池氏は、後鳥羽上皇の院宣に始まる承久の乱に菊池隆能が上皇方に加わったこともあり所領を没収されたが、多くの肥後在郷武士は惣地頭の「所堪」(指導統制)に服す小地頭に組み込まれた。 분지(文治)의 칙허에 따라 슈고(守護)와 지두(地頭)가 설치되고, 헤이케 쪽에 속하던 히고국에서는 동국 무사단이 여러 총지두(惣地頭)의 직을 차지했다. ‘나쁜 무리’(張本の輩)로 여겨졌던 키쿠치씨의 경우,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인젠(院宣[1])으로 시작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키쿠치 요시타카(菊池能隆)가 상황 쪽에 가담한 것도 있어, 그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러나 많은 히고의 재향무사들은 총.. 2023. 8.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9 - 겐페이의 틈새에서 源平の狭間で 겐페이의 틈새에서 保元の乱以降、平清盛が大宰大弐に就任すると、肥後国を含む九州には平家の影響力が強く及び始めた。院政権力と結び、王領荘園の領家や預所職を一族で占め、また受領として国衙の行政権を掌握した。この動きに地方の武士団は、平家の軍門に下るか、もしくは反抗を試みるかの二者択一を迫られた。当時の菊池氏棟梁・隆直が選んだのは後者の道だった。治承4年(1180年)、菊池隆直は大宮司阿蘇惟安や木原次郎盛実など肥後の有力武将と組み立ち上がった。この鎮西反乱は、『玉葉』では「筑紫の反乱」と、終結した年号から「養和の内乱」とも呼ばれる。数万の兵を以って一時は大宰府にまで攻め入った肥後勢ではあったが、平家側の働きかけにより朝廷は原田種直に反乱分子を意味する「鎮西の賊」菊池隆直追討の宣旨を下し、平貞能を追討使として九州に派遣した。押され始めた肥後一党は本拠を攻め込まれ、養和2年(11.. 2023. 8. 15.
쿠마모토현의 역사 8 - 초기 무사단의 형성과 분쟁 初期武士団の形成と争い 초기 무사단의 형성과 분쟁 平安時代後期には、地方で勃興する武士勢力による小規模な争いが見られた。またそこに、白河上皇に始まる院政を背景とした国司支配が絡まり、複雑な模様を呈した。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지방에서 발흥한 무사 세력에 의한 소규모의 분쟁이 있었다. 여기에 시라카와 상황(白河上皇)이 일으킨 인세이(院政[1])를 배경으로 한 국사(国司)의 지배가 얽혀져,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肥後に限らず九州では、鎮西総追捕使を称した源為朝(鎮西八郎為朝)が乱暴を重ねたという記述を『保元物語』に見ることができ、各所に伝承が残っている。下益城郡(現 熊本市南区)富合町にある木原山は別名を雁回山というが、これは同山に砦を置いた鎮西八郎の弓の腕前を恐れ雁がこの山を避けて飛んだという逸話を由来としている。しかし『高野山文書』にある久安2年(1146.. 2023. 8. 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