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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 스토리/쿠마모토의 역사27

쿠마모토현의 역사 27 - 에도 시대의 쿠마모토, 아소, 야마가와 테나가 제도 에도시대 쿠마모토 번과 테나가 제도 쿠마모토 번은 칸에이 12년(1635년), 영내 전역에 ‘테나가’(手永)라는 지방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각 테나가를 관할하는 총쇼야(惣庄屋)[1]를 두었다. 이 테나가란 군과 촌의 중간에 해당하는 구분으로, 호소카와 씨가 부젠코쿠라 번(豊前小倉藩[2]) 시대부터 시행해 온 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총쇼야에는 대부분 대쇼야(大庄屋)나 옛 키쿠치, 아소 씨의 가신 등이 임명됐고, 각각의 테나가에는 회소(会所)[3]라 불리는 관공서가 설치됐다. 거기서 총쇼야는 연공의 청부나 민정의 운영을 맡았다.  당초 테나가는 영내에 100개소 이상 설치됐으나, 통폐합을 거듭해 죠오(承応) 2년(1653년)에는 59개, 그리고 나중에는 51개까지 줄어들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러 테나가.. 2025. 1. 8.
쿠마모토현의 역사 26 - 히토요시 번의 성립, 호소카와의 입국 히토요시번의 성립 히데요시가 큐슈를 통일할 때에 사가라 가문의 존속에 분주했던 후카미 소호(深水宗方)는 자신의 후계 봉행(奉行)으로 인도 요리야스(犬童頼安)의 적자인 인도 요리모리(犬童頼兄)를 지명했다. 하지만 일족의 반대에 부딪힌 요리야스는 요리모리와 함께 자신의 조카인 후카미 요리쿠라(深水頼蔵) 두 사람을 후계로 삼았다. 당주인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는 조선에 출병했을 때에 후카미 요리쿠라를 군사(참모), 인도 요리모리를 그 보좌역으로 삼았으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출병으로 당주가 부재한 때를 노리고 후카미 일족은 소동을 일으키거나, 카토 키요마사에 의지해 사사키로 도주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벌였으나 전부 실패했다. 요리쿠라는 키요마사를 따라 울산성 전투에 나섰으나 사.. 2024. 12. 27.
쿠마모토현의 역사 25 - 아마쿠사의 상황 옛 코니시(小西)령 중 아마쿠사는 쿠마모토번에 포함되지 않았고,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의 히젠 카라츠(肥前唐津)번의 월경지가 되었다. 아마쿠사는 한때 쿠마모토 번령이었지만, 열성적인 법화경(法華経, 妙法蓮華経, 묘법연화경)의 신자였던 카토 키요마사는 키리시탄이 뿌리내린 이곳을 싫어했기에 아마쿠사와 붕고(豊後)의 츠루사키(鶴崎)와의 교환을 신청해 케이쵸 8년(1603년)에 이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케이쵸 6년에 쿠마모토 번령 중에 아마쿠사가 없고 츠루사키가 있었으며, 히젠 카라츠번이 아마쿠사를 지배하고 있던 증거가 발견되어 위 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발포된 신부(バテレン) 추방령 이후에도 코니시 유키나가 휘하였던 아마쿠사.. 2024. 12.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24 -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막번체제의 성립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케이초 5년(1600년) 9월, 양분된 천하를 결정짓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큐슈의 다이묘도 동서로 나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측(동군)에는 카토 키요마사 외에 쿠로다(나카츠), 나베시마(히젠), 호소카와(코쿠라[1])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측(서군)에는 코니시 유키나가 외에 시마즈, 오토모, 타치바나(야나가와)가 붙었다. 사가라씨는 당초 서군에 속했으나, 기후성의 전투 이후 동군으로 갈아탔다. 히고에서는 아리마, 오무라씨의 지원을 받은 키요마사가 시마즈씨 등의 조력을 얻은 우토 하야토(코니시 유키카게)가 지키는 우토성을 공격했다. 공방전은 장기화되어 10월까지 이어졌으나, 이시다 측의 패배와 코니시 유키나가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하야토는 성문을 열고 자결했다.. 2024. 12. 2.
쿠마모토현의 역사 23 - 히고의 반란군 사후처리 히고의 잔당 사후처리  삿사 나리마사가 할복한 다음날, 히데요시는 히고를 양분해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주었다.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성에 근거하며 히고 북부 19만 5천 석의 영지를 받고, 영내에 모리모토 카즈히사(森本一久) 등을 배치했다. 또한, 요리키(与力)로서 활동했던 국인, 삿사의 구신, 영내와 타국의 낭인 등을 불러들였다. 한편, 유키나가는 우토성을 거점으로 하고, 히고 남부와 아마쿠사 14만 5천석을 영유하면서 자신의 직신을 요지에 배치했다. 히토요시의 사가라씨는 히데요시 진공 시에 시마즈씨를 편들었으나, 가신 후카미 소호(深水宗方)의 끈질긴 교섭으로 화를 면했다. 비록, 야츠시로(八代)와 아시키타(葦北)를 잃기는 했으나 히토요시의 본령은 안도되었다. 하지만 사.. 2024. 11. 30.
쿠마모토현의 역사 22 -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과 쿠마모토 근세의 시작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통일 일본사에서 일반적으로 근세는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上洛)을 기점으로 한다. 하지만 히고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을 시작으로 보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3월,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들어온 히데요시는 이후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4월 11일에는 히고 난칸(肥後南関), 16일에는 쿠마모토성, 19일에는 야쯔시로성, 26일에는 미나마타성에 이르렀다. 5월 8일에는 이즈미(出水)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이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니로 타다모토(新納忠元)를 항복시키고 발길을 돌려 6월 2일에는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히고의 국인 52명에게 본령안도(本領安堵[1])의 서장을 보내는 동시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2024. 11. 24.
쿠마모토현의 역사 21 - 항만도시의 발달 항만도시의 발달 중세 후기 일본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교역도 활발해졌다. 히고에도 외국까지 알려진 항만도시가 발달했다. 타카세(高瀬, 현 타마나시)는 하쿠자키궁(筥崎宮)령에 속하며, 키쿠치강과 하네기강(繁根木川) 하구에 낀 교통의 요지였다. 카마쿠라 시대에는 시종(時宗[1])의 간교사(願行寺) 등이 건립됐고, 명나라에 도해하기 전에 젯카이 츄신(絶海中津)도 들렀다고 한다. 죠와(貞和) 3년/코코쿠(興国) 7년(1347년)에는 키쿠치 타케미쯔(菊池武光)의 동생 타케히사(武尚)가 호타기성(保田木城)을 쌓고 이후 타카세씨를 자칭했다. 타카세씨는 간교사를 비롯한 불각(仏閣)에 기부하고, 마을 정비 등에 힘써 객주(問屋)[2] 마을과 직인 마을의 형성에 기여했다. 조선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뤄졌는데, 나중에 타카.. 2024. 11. 20.
쿠마모토현의 역사 20 -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전국시대는 아마쿠사에도 찾아와 각 씨족은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에이로쿠 3년(1560년), 스모토씨(栖本氏)를 공격한 코쯔우라씨(上津浦氏)를 지원한 마쯔라 타카노부(松浦隆信)가 도입한 철포대의 위력이었다. 아마쿠사의 각 가문은 그 유효성을 인정하고 철포를 도입하기 위해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시키 시게츠네(志岐鎮経)는 쿠치노츠(口之津)의 일본 포교장(布教長)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루이스 드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시키(志岐)로 떠나 교회당을 지었다. 또한 그는 시게츠네에게 세례를 실시하여 ‘돈 조안’이라는 세례명을 .. 2024. 11. 18.
쿠마모토현의 역사 19 -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된 히고 각축장이 된 히고 일단 평안을 찾은 오토모씨의 지배도 머지 않아 균열이 생겼다. 히고는 여러 세력이 각축장(草刈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에이로쿠 2년(1559년), 현재의 키쿠치정에서 각자가 국인으로서 독자성을 내세운 구 키쿠치 가신 사이의 권력다툼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아카호시 치카이에(赤星親家)가 아와세가와(合勢川)의 전투에서 쿠마베 치카나가(隈部親永)에게 패하자, 그 아들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統家)는 오토모씨에게 의탁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쿠마베씨는 히젠의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태는 텐쇼 6년(1578년) 11월, 미미카와강의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패배하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류조지씨는 이것을 호기로 여기고 남하를 개시하여, 2년 후.. 2024. 11.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18 - 히고의 전국시대, 키쿠치씨의 멸망 히고의 전국시대 - 키쿠치씨 종가의 단절일본의 전국시대는 메이오의 정변(1493년) 혹은 오닌의 난(1467년)을 기점으로 하지만, 히고국의 전국시대는 키쿠치 요시카즈가 사망한 에이쇼(永正) 원년(1504년)을 시작으로 본다. 아소씨의 전성기아소씨의 내부 분쟁인 마카도바루의 전투(馬門原の戦い, 혹은 幕の平合戦. 장소는 현재의 야마토정 스기키 부근)에 키쿠치 시게토모가 개입했으나 패배한 이후, 키쿠치씨의 지배영역은 줄어들었고, 지도력도 현저히 저하됐다. 가독을 이은 시게토모의 아들 요시카즈는 직신의 저항에 부딪혀, 분키(文亀) 원년(1501년)에 시마바라(島原)로 망명했다. 그러자 일족은 합의 끝에 우토 타메미쯔(宇土為光)를 슈고로 삼았다. 2년 후, 요시카즈는 아소씨, 사가라씨 등과 제휴하고, 아마쿠사씨.. 202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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