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쿠마모토54 쿠마모토는 왜 '불의 나라'라고 불릴까? 쿠마모토의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히고’란 단어가 쿠마모토와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껏 그 유래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히고’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고대사는 문헌자료가 적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신화의 영역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일본 신화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개념이 뒤섞여 있다. 게다가 내가 다루는 쿠마모토 지역은 일본 전체로 보면 변방이기 때문에 참고할 자료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한 최대로 자료를 취합해 히고의 유래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보는 글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히고’란 무엇인가 우선 ‘히고’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면 히고 국(肥後国)이다. 고대 시대 .. 2023. 8. 31. 9월 쿠마모토에 축제 즐기러 갑시다~! 일본에는 현마다 다양한 지역 축제가 있습니다. 쿠마모토 현에서도 매달 다양한 축제가 열립니다. 쿠마모토 여행을 준비 중이신 분들을 위해 9월의 쿠마모토 지역 축제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것들은 일본어로는 ‘마츠리’(祭り)라고 부르는 행사입니다. 마츠리의 동사형인 마츠루(祭る)는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마츠리의 상당수는 신사(神社)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신사와 큰 관련 없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축제’와 비슷한 것들도 있습니다. 개최일 순으로 소개합니다. 2일 - 아라오 시 불꽃축제 2~3일 - 야마토 정 지역축제 9일 - 야마토 정 인형극 축제 9일 - 쿠마모토 항 불꽃축제 13일 - 아라오 시 신사 축제 14일 - 우키 시 불꽃축제 23~24일 .. 2023. 8. 30. 쿠마모토현의 역사 14 - 히고의 '삼국지' 시대 三つの勢力 히고의 세 세력 この状況にさらに混沌をもたらす二つの存在が肥後国に向かっていた。一人目は南朝の征西大将軍・懐良親王であった。親王は伊予・薩摩を経て、貞和4年/正平3年(1348年)肥後の宇土に着いた。迎えた惣領を継いだ菊池武光を伴い、阿蘇惟澄の所領を通過して菊池氏の隈府山に入った。 이 상황에 더욱 혼돈을 가져올 두 존재가 히고 국을 향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남조의 정서대장군인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었다. 친왕은 이요(伊予)와 사쯔마(薩摩)를 거쳐, 죠와(貞和) 4년/쇼헤이(正平) 3년(1348년) 히고의 우토에 도착했다. 그는 총령의 자리를 이은 키쿠치 타케미쯔를 따라 아소 코레즈미의 영지를 통과해 키쿠치 가문의 와이후 산(隈府山)으로 들어갔다. そして二人目は足利直冬。足利尊氏の庶子ながら父に疎まれる、叔父足利直義の養子.. 2023. 8. 27. 쿠마모토현의 역사 13 - 남조에 충의를 지킨 히고 무사단 南朝一辺倒 남조 일변도 天皇親政下の政策は、拙速な改革や朝令暮改、恩賞の不公平や新課税など多くの問題をはらんだもので、親政権は急速にその支持を失っていった。建武2年(1335年)足利尊氏は鎌倉で反親政に乗り出し、後醍醐天皇は新田義貞を討伐に差し向けた。天皇に近侍していた菊池武重・武吉兄弟は「菊池千本槍」を携え、また阿蘇惟時・惟直親子も共に新田軍に加わって、箱根・竹ノ下の戦いに参戦した。この時、阿蘇親子に向けた「後醍醐天皇綸旨」が「阿蘇家文書」として現存している。しかし新田方は破れ、京都までの退却をも追われた。菊池武重は殿軍として足利直義を退ける活躍を見せ、建武3年/延元元年(1336年)には京都・大渡橋の戦いでも尊氏軍を迎撃した。その後武重は比叡山に逃れた後醍醐天皇に付き従い、そのまま軟禁された。 천황 친정하의 정책은 졸속 개혁과 조령모개, 은상의 불공평과 새로운 과세 등 .. 2023. 8. 25. 쿠마모토현의 역사 12 - 남북조 시대에 돌입하다 南北朝の時代 남북조 시대 博多合戦は憎しみ深く 하카타 전투로 생긴 깊은 원한 後醍醐天皇の討幕運動に呼応し護良親王が発した北条高時討伐の令旨は、九州の各武士団にも届いた。元弘3/正慶2年(1333年)初頭、当時の菊池氏棟梁・武時は、筑後の少弐貞経・豊後の大友貞宗とともに鎮西探題を攻撃する密約を交わし、その準備にかかった。しかし、この計画は探題の北条英時に漏れ、英時は彼らに博多への出頭を命じた。同年3月12日菊池武時は阿蘇惟直らを従い向かったが、探題から遅参を責められた。計画漏洩を察した武時は決起を働きかけたが少弐・大友両氏はこれを拒絶した。 고다이고 천황의 토막 운동에 호응하여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내린 호죠 타카토키(北条高時) 토벌의 명령서는 큐슈의 각 무사단에게도 전달됐다. 켄코(元弘) 2년・쇼쿄(正慶) 2년(1333년) 초엽, 당시 키쿠치씨의 .. 2023. 8. 24. 2023 히노쿠니 축제 영상으로 즐기자! (火の国まつり) 지난 8월 5~6일, 쿠마모토의 대표 축제인 히노쿠니 축제(火の国まつり)가 4년 만에 개최되었습니다. 축제의 메인 이벤트는 '오테모양 다함께 춤'(おてもやん総踊り)이라 불리는 행사입니다. 51개 단체에서 약 4000명이 메인 이벤트에 참가해 쿠마모토 거리를 행진했다고 합니다. '오테모양'은 최소한 메이지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쿠마모토의 전통 민요입니다. '양' 부분은 일본어에서 상(さん) 또는 쨩(ちゃん)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과거부터 '오테모양'은 쿠마모토를 대표하는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하필이면 코로나 기간 동안에 쿠마모토를 다녔기에 히노쿠니 축제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대신 올해 히노쿠니 축제는 영상으로 올려주신 분들이 있으셔서 영상으로나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2023. 8. 19. TSMC 쿠마모토 공장 부근에 도로 신설 (쿠마니치신문 230613) 카바시마 이쿠오 지사(蒲島郁夫)는 6월 12일, 쿠마모토 현의회 일반 질문회에서 세계적 반도체 제조회사 TSMC(타이완 적체전로제조)의 키쿠요 정(菊陽町) 진출로 인한 교통 정체 대책을 밝혔다. 신공장 부근에 국가 차원의 정비 공사를 진행중인 중부 큐슈 횡단도로(中九州横断道路)에 인터체인지(IC) 설치를 목표로 한다는 방침이다. 새로운 인터체인지와 신공장 일대를 연결하는 도로 신설도 검토할 예정이다. TSMC의 신공장 부근에는 반도체 기업이 모여있는 '세미콘 테크노파크'(키쿠요 정, 코시 시(合志市))도 있기에, 아침・저녁 통근 시간대를 중심으로 정체가 만성화하고 있다. TSMC 이외에도 소니 그룹이 코시 시에서 공장 건설을 위한 용지 취득을 계획하고 있다. 관련 기업들의 추가적인 진출도 예상되는 가운.. 2023. 8. 18. 쿠마모토현의 역사 11 - 히고 땅에 불교가 퍼지다 得宗専制の影響 토쿠슈[1] 전제정치의 영향 訴え出た竹崎季長は最終的に恩賞を得たが、彼のように武功を挙げながら何ら褒章を受けられなかった者は多く、御家人の貧窮化が進んだ。さらに寛元4年(1246年)執権に就任した北条時頼は幕府権力の掌握と反北条氏勢力の排除を強め、元寇という外患も利用し、北条一門による専制体制を固めた。肥後国に与えた影響も大きく、弘安徳政で事の是正を試みた安達泰盛が廃された霜月騒動以後の守護職は得宗または北条氏族が独占し、一国平均の役で課される税の徴収など本来国司が持つ権限も守護が担うようになった。得宗領とされた荘園も多く、菊池荘や熊本平野の各荘園・八代や球磨郡および天草・寛元2年(1244年)に相良氏から奪った人吉荘北方など、肥後国内全域に及んだ。所領を奪われたり、安堵・自立を脅やかされるなど矛盾を含んだ政治は多くの不満不平を生じ、反体制勢力である「悪党」の発生に.. 2023. 8. 17. 쿠마모토현의 역사 10 - 몽골의 침략(몽고습래) 鎌倉政権下の肥後 카마쿠라 정권 하의 히고 文治の勅許によって守護・地頭が設置されると、平家方にあった肥後国では東国武士が多く惣地頭の職を占めた。「張本の輩」とされた菊池氏は、後鳥羽上皇の院宣に始まる承久の乱に菊池隆能が上皇方に加わったこともあり所領を没収されたが、多くの肥後在郷武士は惣地頭の「所堪」(指導統制)に服す小地頭に組み込まれた。 분지(文治)의 칙허에 따라 슈고(守護)와 지두(地頭)가 설치되고, 헤이케 쪽에 속하던 히고국에서는 동국 무사단이 여러 총지두(惣地頭)의 직을 차지했다. ‘나쁜 무리’(張本の輩)로 여겨졌던 키쿠치씨의 경우,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인젠(院宣[1])으로 시작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키쿠치 요시타카(菊池能隆)가 상황 쪽에 가담한 것도 있어, 그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러나 많은 히고의 재향무사들은 총.. 2023. 8.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9 - 겐페이의 틈새에서 源平の狭間で 겐페이의 틈새에서 保元の乱以降、平清盛が大宰大弐に就任すると、肥後国を含む九州には平家の影響力が強く及び始めた。院政権力と結び、王領荘園の領家や預所職を一族で占め、また受領として国衙の行政権を掌握した。この動きに地方の武士団は、平家の軍門に下るか、もしくは反抗を試みるかの二者択一を迫られた。当時の菊池氏棟梁・隆直が選んだのは後者の道だった。治承4年(1180年)、菊池隆直は大宮司阿蘇惟安や木原次郎盛実など肥後の有力武将と組み立ち上がった。この鎮西反乱は、『玉葉』では「筑紫の反乱」と、終結した年号から「養和の内乱」とも呼ばれる。数万の兵を以って一時は大宰府にまで攻め入った肥後勢ではあったが、平家側の働きかけにより朝廷は原田種直に反乱分子を意味する「鎮西の賊」菊池隆直追討の宣旨を下し、平貞能を追討使として九州に派遣した。押され始めた肥後一党は本拠を攻め込まれ、養和2年(11.. 2023. 8. 15. 이전 1 2 3 4 5 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