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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현의 역사 26 - 히토요시 번의 성립, 호소카와의 입국 히토요시번의 성립 히데요시가 큐슈를 통일할 때에 사가라 가문의 존속에 분주했던 후카미 소호(深水宗方)는 자신의 후계 봉행(奉行)으로 인도 요리야스(犬童頼安)의 적자인 인도 요리모리(犬童頼兄)를 지명했다. 하지만 일족의 반대에 부딪힌 요리야스는 요리모리와 함께 자신의 조카인 후카미 요리쿠라(深水頼蔵) 두 사람을 후계로 삼았다. 당주인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는 조선에 출병했을 때에 후카미 요리쿠라를 군사(참모), 인도 요리모리를 그 보좌역으로 삼았으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출병으로 당주가 부재한 때를 노리고 후카미 일족은 소동을 일으키거나, 카토 키요마사에 의지해 사사키로 도주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벌였으나 전부 실패했다. 요리쿠라는 키요마사를 따라 울산성 전투에 나섰으나 사.. 2024. 12. 27.
쿠마모토현의 역사 25 - 아마쿠사의 상황 옛 코니시(小西)령 중 아마쿠사는 쿠마모토번에 포함되지 않았고,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의 히젠 카라츠(肥前唐津)번의 월경지가 되었다. 아마쿠사는 한때 쿠마모토 번령이었지만, 열성적인 법화경(法華経, 妙法蓮華経, 묘법연화경)의 신자였던 카토 키요마사는 키리시탄이 뿌리내린 이곳을 싫어했기에 아마쿠사와 붕고(豊後)의 츠루사키(鶴崎)와의 교환을 신청해 케이쵸 8년(1603년)에 이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케이쵸 6년에 쿠마모토 번령 중에 아마쿠사가 없고 츠루사키가 있었으며, 히젠 카라츠번이 아마쿠사를 지배하고 있던 증거가 발견되어 위 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발포된 신부(バテレン) 추방령 이후에도 코니시 유키나가 휘하였던 아마쿠사.. 2024. 12. 16.
쿠마모토현의 역사 24 -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막번체제의 성립 카토 키요마사와 그 자손 케이초 5년(1600년) 9월, 양분된 천하를 결정짓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큐슈의 다이묘도 동서로 나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측(동군)에는 카토 키요마사 외에 쿠로다(나카츠), 나베시마(히젠), 호소카와(코쿠라[1])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측(서군)에는 코니시 유키나가 외에 시마즈, 오토모, 타치바나(야나가와)가 붙었다. 사가라씨는 당초 서군에 속했으나, 기후성의 전투 이후 동군으로 갈아탔다. 히고에서는 아리마, 오무라씨의 지원을 받은 키요마사가 시마즈씨 등의 조력을 얻은 우토 하야토(코니시 유키카게)가 지키는 우토성을 공격했다. 공방전은 장기화되어 10월까지 이어졌으나, 이시다 측의 패배와 코니시 유키나가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하야토는 성문을 열고 자결했다.. 2024. 12. 2.
쿠마모토현의 역사 23 - 히고의 반란군 사후처리 히고의 잔당 사후처리  삿사 나리마사가 할복한 다음날, 히데요시는 히고를 양분해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주었다.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성에 근거하며 히고 북부 19만 5천 석의 영지를 받고, 영내에 모리모토 카즈히사(森本一久) 등을 배치했다. 또한, 요리키(与力)로서 활동했던 국인, 삿사의 구신, 영내와 타국의 낭인 등을 불러들였다. 한편, 유키나가는 우토성을 거점으로 하고, 히고 남부와 아마쿠사 14만 5천석을 영유하면서 자신의 직신을 요지에 배치했다. 히토요시의 사가라씨는 히데요시 진공 시에 시마즈씨를 편들었으나, 가신 후카미 소호(深水宗方)의 끈질긴 교섭으로 화를 면했다. 비록, 야츠시로(八代)와 아시키타(葦北)를 잃기는 했으나 히토요시의 본령은 안도되었다. 하지만 사.. 2024. 11. 30.
징용공 위령비 건립에 나선 재일한국인 우판근 씨 이야기 징용공 위령비 건립에 나선 재일한국인 우판근 씨 이야기 후쿠오카와 쿠마모토 두 현에 걸쳐 있는 미츠이미이케 탄광(三井三池炭鉱) 등에서 일한 징용공 출신 자이니치 코리안와 많은 교류를 나누어 온 우판근 씨(禹判根). 2022년 여름, 그는 징용공이 수용되었던 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福岡県大牟田市)의 탄광주택 터에 한국어 비석을 세웠다. 한국 정부는 징용공 문제 해결안을 결정했지만 우 씨는 "정치적으로는 끝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우려를 표했다.  4살 때 한국 거제도에서 일본에 온 우씨는 현재 시민단체 '자이니치 코리안 오무타'(在日コリアン大牟田) 대표를 맡고 있다. 1990년 무렵, 탄광에서 친구를 잃은 전 징용공이 "올 때는 함께였던 네가 왜 죽느냐"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가슴이 아.. 2024. 11. 28.
쿠마모토의 아들, 코노에 타다테루 전 일본적십자사 사장 올해 5월, 일본 적십자사 사장이자 국제적십자사·적신월사연맹(IFRC) 총재를 지낸 코노에 타다테루 씨(近衞忠煇)의 가 출간되었다(중앙공론신사, 인터뷰 및 구성 오키무라 타케시(沖村豪)). ​5월 8일은 국제적십자위원회 창시자인 앙리 뒤낭(Henry Dunant)의 생일이자 '세계 적십자의 날'이다. 일본 적십자사의 전신은 메이지 10년인 1877년 5월 1일,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때 설립된 터라, 일본의 적십자 운동에서 5월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코노에 씨의 저작이 이 시기에 출간된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저자인 코노에 씨는 그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다섯 섭관 가문(五摂家; 고셋케, 가마쿠라 시대(1185~1333) 이후, 후지와라 집안 중 섭정・관백으로 임명된 다섯 개의 가문.. 2024. 11. 26.
쿠마모토현의 역사 22 -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과 쿠마모토 근세의 시작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통일 일본사에서 일반적으로 근세는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上洛)을 기점으로 한다. 하지만 히고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통일을 시작으로 보고 있다. 텐쇼 15년(1587년) 3월,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들어온 히데요시는 이후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4월 11일에는 히고 난칸(肥後南関), 16일에는 쿠마모토성, 19일에는 야쯔시로성, 26일에는 미나마타성에 이르렀다. 5월 8일에는 이즈미(出水)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이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니로 타다모토(新納忠元)를 항복시키고 발길을 돌려 6월 2일에는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히고의 국인 52명에게 본령안도(本領安堵[1])의 서장을 보내는 동시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2024. 11. 24.
쿠마모토 편집샵의 개척자 '퍼머넌트 모던' 폐점소식 출처 : 2024. 11. 20. 자 쿠마니치사와모토 마리코(澤本麻里子),  쿠마모토시 중앙구 신시가이 샤워도리(シャワー通り) 길가에 위치한 패션 편집샵 '퍼머넌트 모던'(PERMANENT MODERN)이 11월 말로 문을 닫는다. 대표 아리타 마사히로 씨(有田正博, 72세)는 토쿄보다 앞서서 수입 브랜드를 매입해 최첨단 패션을 제시해 온 편집샵의 개척자로, 업계에서도 누구나 알아주는 존재이다. 은퇴를 결심한 아리타 씨를 찾아 현재 심경을 물었다.  ​아리타 마사히로 씨는 1952년 야츠시로시(八代市) 태생으로 토쿄와 쿠마모토의 남성복 가게에서 근무하다가, 1976년에 '아웃도어 스포츠'를 개점했다. 쿠마모토시 중앙구 신시가이 주변에서 'Lope', 'BLAZE' 등 독특한 편집샵을 잇달아 열었다. 19.. 2024. 11. 22.
쿠마모토현의 역사 21 - 항만도시의 발달 항만도시의 발달 중세 후기 일본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교역도 활발해졌다. 히고에도 외국까지 알려진 항만도시가 발달했다. 타카세(高瀬, 현 타마나시)는 하쿠자키궁(筥崎宮)령에 속하며, 키쿠치강과 하네기강(繁根木川) 하구에 낀 교통의 요지였다. 카마쿠라 시대에는 시종(時宗[1])의 간교사(願行寺) 등이 건립됐고, 명나라에 도해하기 전에 젯카이 츄신(絶海中津)도 들렀다고 한다. 죠와(貞和) 3년/코코쿠(興国) 7년(1347년)에는 키쿠치 타케미쯔(菊池武光)의 동생 타케히사(武尚)가 호타기성(保田木城)을 쌓고 이후 타카세씨를 자칭했다. 타카세씨는 간교사를 비롯한 불각(仏閣)에 기부하고, 마을 정비 등에 힘써 객주(問屋)[2] 마을과 직인 마을의 형성에 기여했다. 조선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뤄졌는데, 나중에 타카.. 2024. 11. 20.
쿠마모토현의 역사 20 -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아마쿠사에 전파된 기독교 전국시대는 아마쿠사에도 찾아와 각 씨족은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에이로쿠 3년(1560년), 스모토씨(栖本氏)를 공격한 코쯔우라씨(上津浦氏)를 지원한 마쯔라 타카노부(松浦隆信)가 도입한 철포대의 위력이었다. 아마쿠사의 각 가문은 그 유효성을 인정하고 철포를 도입하기 위해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시키 시게츠네(志岐鎮経)는 쿠치노츠(口之津)의 일본 포교장(布教長)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루이스 드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시키(志岐)로 떠나 교회당을 지었다. 또한 그는 시게츠네에게 세례를 실시하여 ‘돈 조안’이라는 세례명을 .. 202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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